노블레스오블리쥬/ 고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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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5.08.30 16:06

노블레스오블리쥬/ 고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노블레스오블리쥬/ 고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기부문화의 파이오니아 고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재산을 남기는 것은 하(下), 사람을 남기는 것이 최고(上)의 인생”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재일동포가운데 빛나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 바로 김희수 전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이 아닐까. 그는 재일동포사회에서 졸부도 거부도 아니었다. 한때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진정 그가 빛나는 이유는 바로 노블레스오블리쥬를 실천한 민족주의자요, 인간애를 실천했던 박애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의 저팬드림이 달리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삶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간단하게 조명해본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재일동포들의 삶은 말 그대로 땀과 눈물, 그리고 한(恨)의 역사다.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꿋꿋하게 일어선 재일동포들이 적지 않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에서부터 현재 일본 재계에 손꼽히는 빠친코의 대부 한창우에 이르기까지 손가락으로 셀 수 없다. 모두 저팬드림의 대표주자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저팬드림을 완성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 특히 재일동포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함이 녹아 있을 때 저팬드림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김희수 이사장은 근검과 절약정신으로 기업을 일으킨 뒤 인간사랑과 나라사랑을 위한 신념으로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의 교육 사업은 투자가 아니라, 바로 기부라는 점이 한국과 다르다. 제도와 문화도 그렇다. 1987년 부도난 중앙대를 인수할 당시 김 전 이사장의 자산은 일본에서 3조원에 이르는 등 대표적인 재일동포 사업가였다. 그의 앞날도 거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갑자기 일본의 거품경제가 걷히면서 그의 자산도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중앙대를 인수한지 10년이 지날 즈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도 IMF위기를 맞았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김 이사장은 민족대학의 자부심과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본 회사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중앙대에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견실하던 회사도 휘청거렸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고집을 피울 입장도 되지 않았다. 헐값이지만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넘긴 배경이다. 당시 중앙대는 안성캠퍼스를 포함해 자산가치가 3조원에 이르렀지만 결국 1200억원을 손에 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김 이사장은 3명의 자식들이 있지만 이들에게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한국의 수림문화재단과 수림재단(장학 사업)에 각각 1000억원과 200억원 등 1200억원을 모조리 기부한 뒤, 4년 남짓 한국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다가 2012년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1988년 체육훈장 청룡장과 국민훈장 모란장(1994)을 수상한 그는 2001년 러시아 게르첸대에서 명예교육학박사를 받았다. 수림문화재단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문화예술의 저변을 확대하고 문화혜택을 골고루 나누자는 취지로 2009년 설립됐다. 수림문학상을 비롯해 매년 북촌 뮤직페스티벌 지원 및 사진 공모전 등 다양한 문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공수래공수거 진리 실천한 거인

일본 동경 근교에 있는 하치오지(八王子)공동묘지의 1평짜리 묘소에 잠들었다. 살아생전 “인생은 1엔짜리 납전 하나 들고 가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던 그는 죽어서까지 절약을 실천한 작은 거인이자 ‘공수래공수거’라는 진리를 몸소 보인 참 스승이었다. 현재 1961년 세웠던 금정기업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1988년과 2001년도에 설립한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만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다음은 신경호 일본 국사관대학교 교수이자 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의 회고다.

“한국의 IMF의 불통이 일본의 금정기업은 물론 수림외어전문학교까지 튀었습니다. 중앙대 이사진들은 김희수 이사장님에게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해야 한다고 연일 바람잡이를 했어요. 이들의 속셈은 다른 데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중앙대의 뿌리는 일본의 금정기업과 수림외어전문학교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뿌리를 잘라내면 중앙대의 정체성마저 흔들린다고 오히려 제가 설득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 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제가 학생 모집을 위해 중국과 베트남으로 날아갔던 겁니다”

신 교수는 중국어 한 마디 구사하지 못했지만 그의 강렬한 눈빛과 집념, 빼어난 화술로 중국유학생 모집에 성공한다. 베트남도 마찬가지. 당시 한국유학생은 포기했다. IMF로 일본에 와 있던 유학생들은 본국으로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역곡절 끝에 700여명의 정원을 채우면서 신 교수는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용기와 집요한 근성으로 김 이사장에게 보답한다. 김희수 전 이사장의 후계자로 신 교수가 발탁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경호 교수는 1983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김희수 이사장을 만나 30여년간 고락을 함께 해온 사실상 동지였다. 수림외어전문학교 및 수림일본어학교를 설립할 때도 신 교수는 김 이사장과 힘께 까다로운 설립 절차를 비롯하여 모든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을 내렸다.

“유학생 시절입니다. 유학생들이 종종 재일동포 사업가들께 학생회 활동비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의 L그룹의 S모 회장님을 찾아 뵐 때는 비서를 통하여 봉투하나를 넘기고 말았지만, 김희수 전 이사장님은 S모 회장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내 놓고 늘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유학생들에게 미래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자산이라며 민족의 자긍심을 가져 달라고 격려했던 분입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건물의 좁은 방에서 늘 따뜻함을 잃지 않으신 아버님같은 분이셨어요. 제가 평생 김희수 이사장님을 존경하게 된 배경입니다”

 

한(恨)은 매의 발톱

김희수 이사장은 1924년 일제시대, 경남 마산시 진동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는 한(恨)의 극복이었다. 그가 말한 한(恨)이란 배우지 못해 천대받고 무시당한 한(恨)과 창자가 끊어질 만큼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한(恨)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한(恨)은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에였다. 재일동포들의 삶은 더욱 그랬다. 사업을 하든 교육을 받든 취직을 하든 모든 게 차별과 냉대뿐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의 삶은 해방이 됐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 네살 때 현해탄을 건넌 뒤 그는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김희수 이사장.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며 늦깎이로 29세에 동경 전기대학을 졸업한 뒤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이어 1961년 금정기업을 설립한 뒤 한때 6개의 회사에서 36개의 빌딩을 소유할 만큼 거부의 반열에 오른 그는 거부가 됐어도 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근검절약을 통해 기업을 일으켰다. 하늘을 나는 매가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서는 발톱을 감추어야 했듯 겸손과 배려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가 60대에 들어서야 교육사업에 뛰어든 배경에 대해 김 이사장은 “인생에 있어 재산을 남기는 것은 하(下)의 인생이고,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중(中)의 인생이며 사람을 남기는 것이 최고(上)의 인생이다”라고 밝힌바 있다. 그렇다. 이것만이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으니 공짜를 조심하라‘” 늘 베풀고 도우며 살아라“”남을 슬프게 하지 말라“ 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이를 실천했던 분이라는 신 교수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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