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오블리쥬-김길원 메디힐 두경부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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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5.23 15:22 Updated

노블레스오블리쥬-김길원 메디힐 두경부클리닉 원장

노블레스오블리쥬-김길원 메디힐 두경부클리닉 원장

 

‘충무로 큰 바위 얼굴’…지역사업, 인술 봉사 등 이타적 삶

 

‘의업 반세기’ 지역민의 ‘멘토’ 역할, “환자는 내 이웃, 진료실은 고충상담실”

세운상가 일대 도시정비사업 이끌어…지역민 신망 속 난관 극복, 문제 해결

 

결코 드러내지 않지만 빛이 나는 사람이 있다. 이타적 삶을 소명으로 삼으며 자기 분야의 1인자가 되기도 하고, 남이 아파하면 발벗고 나서는 그런 사람이다.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 뒤, 메디힐 두경부클리닉의 김길원 원장(77)은 그런 실천적 삶의 표본이다.

의업(醫業) 반세기-. 그 속엔 힘겨운 삶에 부대끼는 이웃과 함께 한 나이테가 켜켜히 새겨져있다. 공동체적 선을 위해 고뇌하고 선택했던 기억도 무수히 배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충무로, 큰바위 얼굴’이라 한다.

 

이 병원에서 김 원장은 ‘큰 원장님’으로 불린다. 병원뿐 아니다. 세운상가와 명보극장을 에워싼, 대략 1~2km 반경의 지역사회도 그를 ‘큰 원장’으로 여긴다. 인술을 실천하며 세인과 공감해서일까. 그는 많은 사람의 큰 형님이며, 큰 아버지다. 그런 세월이 어언 50여 년-.

“미국 이민 갈려다 충무로에 ‘깃발’ 꼽고 지낸 세월이 벌써 그리됐네요”

김 원장은 허허로운 웃음으로 그 시간들을 추억한다. 하지만 단 한순간 허투루 메워지지 않았던 세월이었다. 때론 성취를 향한 인고의 아픔도 있었고, 타인을 위한 무한한 희생도 있었다. 마침내는 명의를 넘어선 명인의 광채를 발하게 된 오늘의 시간까지 그 속엔 들어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입문, ‘국내 이비인후과의 최고봉’에…

김 원장은 미국 남장로계의 전주예수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만 43년 봉직하며, 소시적부터 한국 최고, 최첨단 의술을 익혀왔다. 그리곤 국내 최초로 고막이식수술에 성공하며, 이비인후과계의 태두로 우뚝 서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전주는 국내 첨단의료의 1번지로 주목받았다. 당시 세계 최첨단 의술로 무장한 남장로계 미국 의사들이 대거 파견되어 의료수준이 국내 어떤 지역보다 높았다. 김 원장처럼 전주예수병원에 뿌리를 둔 동문들은 약 50여 명. 그들은 국내 의학계와 의술발전을 선도하며, 의료계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해왔다.

그런 후광 덕분일까. 이 병원의 김재경 행정부원장(이비인후과 전문의)은 “(메디힐 두경부클리닉은) 장차 세계로 뻗어가는 두경부 네트워크로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원장의 ‘인술’은 진료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웃과 동네, 지역사회를 향해 그야말로 인(仁)의 행적을 실천하며 산다.

“내 진료실에 오는 사람들은 ‘환자’이자 이웃이죠. 진료가 끝나고 처방을 해주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각자 개인사나 재산문제 등등을 물어보기도 하죠”

진료실은 졸지에 상담실이 되고, 소통과 치유 공간도 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패스트푸드 KFC 브랜드를 상징하는 창업자 커넬 샌더스와 같다고나 할까. 넉넉한 풍모의, 기대고 싶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 김 원장 스스로는 “동네 골목대장”이라고 했다.

 

지역민들, 어려운 일 닥치면 ‘큰 원장님’ 찾아

그의 넉넉한 품은 지역사회와 지역민들을 아우르는 봉사로 확장되곤 했다. 지역 유지로서, 어른으로서, 궂은 일 좋은 일 마다않고 나섰다. 나섰다기보단, 답답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때면 사람들이 먼저 찾았다. 문제 해결을 호소하며, ‘멘토’가 되어주길 청했다. 이들을 일일이 보듬고 손을 잡다보니 김 원장은 만사의 해결사가 되고,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다. 은행 창구에선 그의 얼굴이 곧 신분증이다. 각급 관청이나 기관장들도 수시로 인사차 온다.

그런 신망을 얻어온 그가 지난 수 년 동안 심혈을 쏟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세운상가 일대 도시정비사업이다. 이 지역에 대한 재개발과 정비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왔다. 특히 도심공동화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더욱 그랬다.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세운상가 원형을 보존하되, 12만평의 주변지역을 새롭게 정비하는게 골자다. 각기 1만2천여 평 크기의 8개 구역으로 구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이다.

김 원장은 “도심 공동화 현상은 도시경쟁력을 추락시키고, 나아가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며 “특히 수도 서울의 한 복판이 쇠락한 모습으로 방치된 것은 큰 문제”라고 했다.

“다만 키워드는 분명합니다. 유서깊은 세운상가와 충무로, 이순신 장군 출생지, 한류 등이죠.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이라고 할까요.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 세계적인 관광과 상업의 명소를 만드는게 목적입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만큼이나, 장애물 ‘스토리’도 많았다. 워낙에 절차와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보니,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정비사업의 숱한 난제들도 지혜롭게 해결

첫 단추를 꿰는 일부터 난제였고, 어렵사리 단추를 꿴다고 해도, 일이 꼬이기 십상이었다.

세운 4구역이 대표적이다. 지주들의 합의로 SH공사를 시행사로 선정하긴 했다. SH공사는 거액의 보상금을 들여 주민들이 이주하도록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건축심의 과정에서 7층 이상 고도제한 규정에 가로막힌 것이다. 결국 사업성이 떨어져 8년째 표류하며, 주민들만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주민들로선 이런 복잡한 갈등 국면의 ‘해결사’가 필요했다. 바로 김 원장이었다. 김 원장으로서도 지역민들의 요청과 성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추진위원장을 맡고나서, 하나하나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흔히 도시정비사업방식은 네 가지가 있다. 조합방식과 토지 등 소유자 방식, 주민합의 방식, 수용방식이다. 그 중 가장 전통적(?)이며 원색적인 것이 수용방식이다. 한때 서울시도 전면철거에 의한 수용 방식을 검토했다. 편하게 싹 밀어버리고, 새로 빌딩을 짓는 방식이다.

그러나 김 원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는 또 다른 재앙을 부릅니다. 사업 수익성도 기대할 게 없고, 삶의 질이나 도시환경면에서도 더 나쁜 결과를 부릅니다. 그야말로 ‘뺄셈’의 정책이죠.”

그래서 박원순 시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전면철거 대신 구역단위 개발 방식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다행히 박 시장과 서울시도 이를 받아들였다. 다음엔 지역 내 시유지 불하가 문제였다. 서울시는 ‘4년 거치, 7년 상환, 7% 이율’을 제시했다. “하지만 과연 주민들이 그런 조건을 부담할 만한 능력이 있을리 만무였다”는 김 원장은 다시 서울시를 집요하게 설득, ‘7년 거치, 20년 상환, 4% 이율’의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개발만 되면, 그깢 이자수입이 문제냐? 개발이익에서 나온 세수효과가 그 보단 몇 배는 될 것아니냐?” 당시 김 원장의 논리였다.

 

재개발사업 초유, ‘최단 기간, 800여 명 사업동의서’

김 원장이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3구역의 경우 김 원장의 리더십을 신뢰한 주민들은 앞다퉈 사업 동의서에 서명했다. 순식간에 800여 명이 도장을 찍었다. 술수나 강제가 없는, 순전한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었다. 각종 개발사업에선 보기 드문 ‘기현상’이었다. 사업 방식에 대한 공감대의 표출이자, 김 원장의 인간적 면모와 인격에 대한 지역민들의 존경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흔히 도시개발사업 현장에선 어느 일방의 주장이나 독선으로 분란이 생기곤 한다. 김 원장은 이를 철저히 경계했다. 배제가 아닌 소통, 설득에 앞선 경청, 정보 독점이 아닌 공유를 실천했다. 김 원장 특유의 리더십이었다.

주민들과 수시로 모임도 갖고 가슴을 연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도시정비와 도시계획에 관한 강의나, 설명회도 부지런히 열었다.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알아야 공감대도 생기고, 문제 해결책도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그 결과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호응했다.

덕분에 세운상가 일대 도시정비사업은 어려움이 있긴 하나,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메디힐 두경부클리닉이 포함된 3구역의 경우 시행사가 상당한 수준의 토지매입을 진행한 단계다.

 

“‘이순신, 한류’ 키워드, ‘스토리텔링’의 도시재생”

김 원장은 “단순한 ‘정비’가 아닌, 재창조라고 해야 옳다”고 했다. 충무로와 세운상가, 이순신장군 출생지라는 역사적, 문화적 아이콘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 기념사업단, 충무로 문화․예술사업단 등의 소프트웨어도 그런 맥락이다. ‘한류 1번지’로 새롭게 변신시킨다는 전략도 마찬가지다.

김 원장은 그런 공인의 감각을 바탕으로 지난 3대, 5대 서울시의원을 지냈다. 당시 그는 슬럼화됐던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의 정비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너무나 퇴락한 달동네의 현실을 개선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결국 당선 후 시의회 도시정비위원회에서 활약하며, 복잡한 장애물을 돌파하고 재개발을 완수하는 수완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도시계획법을 집중 공부했다. 별도로 도시정비사 자격증도 취득할 정도로, 도시계획 이론과 실제를 꿰뚫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세운상가 일대 정비사업의 전면에 그가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노력과 관록이 큰 몫을 한 셈이다.

 

김 원장은 ‘충무로’를 지극히 사랑한다. 재물이나 명리보다, 사람과 도리를 우선했다고 할까.

“아마 남들처럼 진작에 강남에 땅을 샀거나, 아예 옮겨갔더라면 ‘떼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숱한 환자들을 돌보며, 의사로서의 삶 대부분을 보낸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충무로’는 예사로운 충무로가 아니다. 삶의 터전이자, 어제, 오늘과 분리될 수 없는 미래의 조감도다. 그가 지역 정비사업에 골몰하는 것도, 주변의 이웃과 부지런히 교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 실천적 비전의 현장이 곧 ‘충무로’이기 때문이다.

“돈이요? 물론 돈 많이 벌면 좋죠. 하지만 돈으로 어떤 가치를 만드느냐, 그게 더 중요한 겁니다. 진정한 돈의 가치는, 어떻게 값있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갈려다, 이곳 충무로에 깃발 꽂았다”는 지난 43년의 무게는 크다. 그 세월은 오늘의 ‘충무로 큰 바위 얼굴’, 그것의 무게다. 김 원장이 선사받은,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적, 사회적 중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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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5.23 15:2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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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의 댓글

  1. 숭보 5월 24, 09:53

    어떻게 값있는 인생을 사느냐..
    소중한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이 같이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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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덴바코리아 6월 5, 11:46

    공간에너지중의 하나인 덴바기술과 의료기술의결합으로 인류의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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