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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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5.24 21:29

문화/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 개관

문화/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 개관

 

동교(東喬) 김희수 선생의 교육·문화 정신 잇는다

수림아트센터 개관…8.12일까지 최승희 사진전도 개최

 

수림문화재단(이사장 하정웅)은 지난 12일(목) 서울시 동대문구 홍릉에서 『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Soorim Arts Center)』 개관식을 열었다. 『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는 수림문화재단의 설립자이신 故 동교(東喬) 김희수(金熙秀) 선생(1924~2012)의 교육·문화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故 김희수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으로 간난신고를 겪으며 기업인으로 대성해 조국 대한민국의 인재육성, 교육발전과 문화 예술 진흥에 진력했다. 故 김희수 선생은 23년간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2009년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해 자신의 인생철학인 문화입국(文化立國)을 실천했다.

재단은 그동안 ‘북촌뮤직페스티벌’, ‘수림문화예술 대학생 아이디어 공모전’, ‘수림문화재단 인문학 아카데미’, ‘전주세계소리축제’, ‘임방울국악제’ 등을 주최 또는 후원하였다. 또한 <수림문화상>, <수림문학상>을 제정하여 신진예술가와 유망소설가 발굴 및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12일 오후 열린 수림아트센터 개관식에는 김창수 중앙대 총장,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도올 김용옥 등 총 300명이 참석해 개관을 축하했다.

하정웅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수림문화재단은 설립자 김희수 선생의 망국, 무지, 빈곤극복이라는 교육정신을 계승해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을 내걸고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문화의 융성과 번영을 나누고, 교류와 친선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도올 김용옥은 축사에서 “수림문화재단이 인재 발굴과 양성에 힘쓰신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예술작품 전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고민과 큰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수림문화재단은 2013년 부산으로 이전한 (舊)영화진흥위원회 건물을 인수해 홍릉일대의 자연 풍광과 역사성을 아우르는 『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를 오픈했다. 3층 건물의 내부 공간은 갤러리, 공연장, 강의실 및 작업공간, 연습실, 야외마당, 자료실, 옥상 정원, 하늘전망대 등을 갖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문화 명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개관특별전으로 ‘하정웅 Collection 무용가 최승희 사진 展: LEAP & EXTENSION 도약 그리고 펼침’이 오는 8월 12일까지 준비되어 있다. 수림아트센터는 “친일행적과 가족 동반 월북으로 외면당했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인간적 면모를 다룬 전시”라며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인 하정웅 선생이 수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개관특별전에는 무용가 최승희 관련 사진 139점(하정웅 Collection, 수림문화재단 소장), 자료, 기사, 도서 등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대여한 17점의 사진과 유화작품, 그리고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역사관에서 대여한 6점의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수림문화재단 홈페이지 www.soorimcf.or.kr / 문의 02-962-7911

 


 

모순의 시대를 극복한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崔承喜,1911~1969)

친일행적 논란 속에 예술가로서 재평가 목소리

 

숙명여학교 보통과 시절 가장 키가 작고 어린 학생이었던 최승희는 남들보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당시 만주공연을 마치고 경성에 들른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를 만나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하고 경성방송국 연예 분야를 담당하던 오빠 최승일의 후원을 받아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으로 지원, 일본에 건너간다. 그 후 3년 만에 귀국해서 남산 근처에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공연활동을 했다. 결혼해서 딸을 출산한 후에도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신작발표회를 열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댄스영화 장르에 속하는 “반도의 무희”의 주연을 맡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마라톤 대회 우승자인 손기정과 함께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모던한 단발머리는 최승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조미료, 화장품, 옷, 축음기 등 당시 각종 광고의 단골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무용 세계는 1938-41년 사이에 미국, 유럽, 남미 등을 순회공연하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한다. ‘코리언 댄서’로서 그는 보살춤, 초립동, 남사당패 등 한국적인 소재를 살리는 동시에 세련된 감각과 빼어난 기량을 발휘해서 이방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전에는 물론 그 후에도 최승희 만큼 호평을 받은 한국 무용인은 드물다. 최승희는 창씨개명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崔承喜 또는 해외 공연 시에는 崔承喜의 일본식 발음인 ‘사이 쇼키(Sai Shoki)’를 사용했다. 그리고 외국 언론에 자신을 반드시 Japanese dancer가 아닌 Korean dancer로 소개하였다. 그 당시 조선 출신 최승희에게 이것은 상당한 고통과 불이익을 안겼을 것이며, 무용가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데 나름대로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1940년대 초반 태평양 전쟁 당시, 군국 일제의 강압으로 위문 공연에 내몰린 친일 행적 때문에 1945년 광복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식민지 막바지의 광란 속에서 중국으로 잠시 무대를 옮겨 혼란의 중심을 피해보기도 하다가, 해방 정국을 맞이해서 남편과 함께 북한으로 가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로 오랫동안 최승희는 남한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거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북한에서도 일찍부터 ‘숙청설’이 있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 복권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참하게 일생을 마감하였고 오랫동안 남과 북 양쪽에서 잊혀졌지만, 한국 최초의 한류스타이자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예술에 대한 꿈과 열정은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시대의 모순 속에 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무용가였고, 인간의 모순과 한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불굴의 예술가! 이번 전시회가 그녀의 혼을 만나고 다시금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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