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쥬/ 아메리칸 드림 완성한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 “한상(韓商) 최대규모의 5,000억 자선재단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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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9.27 17:10

노블레스 오블리쥬/ 아메리칸 드림 완성한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  “한상(韓商) 최대규모의 5,000억 자선재단설립”

노블레스 오블리쥬/홍명기 듀라코트 회장

아메리칸 드림 완성한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

“한상(韓商) 최대규모의 5,000억 자선재단설립”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사람은 모든 일에 땀 흘리며 성실하게 일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렇다. 역사 속 위인들의 공통점은 늘 성실한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고 있는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도 ‘성실’과 ‘겸손’함을 무기로 평생 외롭고 의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올해 여든을 넘겼지만 아직도 그는 세상의 빛과 소금을 자처하고 세계를 누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늘 향기가 묻어나고 감동이 넘친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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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미국의 한인매체는 홍명기 회장이 30년간 일군 듀라코트를 세계적인 페인트 회사인 엑설타사에 매각한다는 뉴스를 대서특필했다. 잠시 한인사회가 술렁거리기도 했지만 역시 “홍명기 회장답다”는 대다수의 반응들이었다. 기자는 지금까지 홍명기 회장과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이번 듀라코트의 매각 대금은 대략 10억 달러 수준(한화 1조1000억원). 이 가운데 절반은 재단을 만들어 자선을 사업을 하겠다는 보도다. 재단 이름은 홍 회장과 아내 로리 홍 여사의 이름을 따 ‘M&L HONG 파운데이션으로 정했다. 1986년 홍 회장이 창업한 듀라코트는 건축용 철근의 부식을 막는 ‘세라나멜’을 비롯해 수백 종류의 산업·건축용 특수페인트를 제조하는 회사로 연간 2억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견기업에 해당되지만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성사된 것은 듀라코트의 높은 기술력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듀라코트를 인수하는 ’엑셀타 코팅 시스템‘은 1866년 설립돼 올해로 150주년을 맞고 있으며,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시가총액 65억달러)다. 특수페인트와 소재 업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일당 1달러 벌이로 대학을 졸업하다

홍명기 회장은 신문사와 극장사업 등 문화 사업을 하는 사업가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하인들이 들락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부친의 사업은 늘 굴곡이 심했다. 이런 환경에 불만을 품고 그는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부친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부잣집 아들의 봄날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이후 서울대 문리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하면서 생전 처음으로 인생의 쓴 맛을 봤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가세도 기울었다. 미 콜로라도대 화공과에 등록을 마쳤을 때 그의 수중에는 500달러밖에 없었다. 하루 1달러 짜리 목장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생의 막장까지 몰렸다. 조금 나은 조건의 하우스보이, 구내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지만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수업료를 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는 콜로라도대에서 UCLA화학과로 전학을 한 뒤였다. 결국 스승인 백인 여교수에게 “이제 학교 못 나오게 됐다”며 이유를 설명하자 뜻밖에도 교수는 다음날 학교에 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은행에 데려가 만기전 채권을 환전, 200달러를 건네주며 등록하라고 했다. 이때의 감동을 잊지 않고 그는 평생 간직하며 살아왔다. 이때 그는 결심했다. ‘나중에 돈 벌면 남을 꼭 돕겠다’고…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동차 도료와 수지(樹脂)를 연구하는 회사에 취직해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여교수를 찾아가 돈을 내밀었다. 그 여교수는 “아이 디든 익스펙트(I didn’t expect·기대하지 않았다)”라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차별과 냉대를 딛고 일어서다

이민사회에서 마이너리티(소수민족)에게 ‘유리천장’은 주홍글씨다. 홍 회장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차별과 냉대의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수차례 직장을 옮겨 다니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발한 기술로 회사는 돈방석에 올라섰지만 그에게 돌아온 보상액은 쥐꼬리수준이었다. 이게 냉혹한 현실이었다. 입사 동기인 백인들은 회사에서 부사장도 되고 사장도 되는데 그는 실장직에서 더 올라갈 수 없었다. 직장생활 27년, 울분을 삼키고 있을 때 간호사인 부인이 “당신 사업하다 망하면 내가 밥 먹여 살릴 테니 걱정 말고 해보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 2만달러로 회사를 세운 게 지금의 듀라코트다. 그때가 85년, 보통은 모험보다 안전을 택할 51세의 나이였다. 이듬해인 1986년 창업을 한 뒤 그는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이국땅에서 그가 내세울거라곤 땀뿐이 더 있겠나 싶었다. 땀과 눈물로 개발한 제품을 들고 스미토모라는 일본 회사의 거래처를 찾아갔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한국인이라는 비아냥만을 듣고 뒤돌아섰다. ‘유리천장’이 버티고 있었던 것. 그러나 5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듀라코트는 굴지의 대기업들과 경쟁해 스미토모철강의 주요 거래처가 된다. 홍 회장의 성실함과 기술력, 뚝심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시작한 듀라코트는 미국 내 특수 페인트 시장에서 ‘TOP5’라는 금자탑을 쌓게 된다. 이런 가운데 1992년에 터진 LA폭동 또한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유리천장으로 각인됐다. LA폭동은 백인 경찰들이 흑인 한 명을 집단으로 구타하자 흑인 시위대가 한인 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그럼에도 미국 사법당국과 지역 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미국 사회에 잠복한 근본적인 문제보다 한흑(韓黑)갈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한인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는 엄청난 물질적 피해를 남겨줬다. 홍 회장은 “당시 부시 대통령은 물론 연방정부 및 주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LA한인타운을 방문했지만 한인사회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할 동포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땅을 쳤다”고 회고했다. 이때 “나만 잘 살겠다고 비겁하게 살지 않았나”며 “동포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홍 회장은 이때부터 사회사업과 자선사업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린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면 미국 가서 돈을 많이 벌었거나 자식농사 잘 지어 명문대에 보낸 경우를 말한다. 성공의 필수요소가 돈과 자식교육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은 아무래도 속물적이다. 홍 회장은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은 “성실하게 땀 흘려 번 돈을 남을 위해 쓸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운 눈길을 받지 못한다면 돈도 지위도 모두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설명이다.

 

홍명기 밝은미래재단 이사장이 2010년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에게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여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홍명기 밝은미래재단 이사장이 2010년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에게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여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2015년 8월 홍명기 회장이 미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이 형성됐던 리버사이드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5년 8월 홍명기 회장이 미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이 형성됐던 리버사이드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인사회의 롤모델 홍명기 회장

홍 회장은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이나 2005년 작고한 김영옥 대령의 삶에서도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며 세계적인 부호인 워런 버핏이 미국의 400대 부호에게 재산의 50%이상을 기부하자고 제안한 사실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60세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던 록펠러도 본격적인 기부에 나서면서 30여년을 더 살지 않았느냐”며 자선과 기부활동에 남다른 관심을 표명해왔다. 자녀에게도 “나의 재산에 기대를 하지 말고, 내가 걸어온 길을 따르면 좋겠다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차세대 양성에서부터 각종 한인관련 단체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2001년 설립한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하면서 당시 10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이미 실천했다. 비영리 법인인 ‘밝은미래재단’은 한인 차세대들의 정치학교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LA폭동에서 경험했듯이, 차세대 정치인 양성을 통해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 재단설립의 목적이다. 홍 회장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출신들의 한인정치인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자선사업은 한 마디로 마침표가 없다. 1999년 남가주한국학원이 폐교위기에 처할 때나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건립에도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외에도 LA카운티 미술관내 한국관 설립과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대한인국민회관 복원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필생의 사업 중의 하나로 여길 만큼 애착을 가진 사업이 ‘고 김영옥 대령 선양’사업이다. 김영옥 대령은 미주 한인 2세로 미군 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을 지낸 전설적인 전쟁영웅이다. 특히 김 대령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민족의 인권신장을 위해 평생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2005년 영면에 들어갔다. 2012년 LA에서 열린 싸이공연에부터 3년전 삼육대학에 10억원을 기부한 것은 물론 국내외 크고 작은 공익 행사에 빈손으로 오가는 법이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향기가 나지 않는 법. 홍 회장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따뜻한 봄길만을 고집했다면 그의 삶이 아름다웠을까. 그는 슬하에 1남 3녀를 뒀다.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두 딸과 지금 부인과 결혼하면서 생긴 입양아가 둘이 있다. 입양아 둘 중 큰 딸은 부인이 홍 회장을 만나기 전부터 입양해 살던 혼혈아이고 막내 아들은 생후 1년 만에 부모 잃은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회계사, 대학교수, 치과의사 등으로 키워냈다. 미주사회는 물론 해외동포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는 그의 삶 하나 하나가 향기가 나는 이유들이다.

 

 

■ 홍명기 회장 이력

△1934년 서울 출생 △서울 중앙고 졸업(1953) △미국 UCLA 화학과 졸업(1959) △미국 라 시에라대학 인류복지학 명예박사(2002) △제10기 민주평통 LA협의회 회장(2001~2003)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2000~2001) △재미한인교수협회 고문(2001~현재) △KIST 자문위원(2009~현재) △UCR 총장 자문위원(1998~현재) △대한민국 국민장 동백장(2003)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사장(2010) △국민훈장 무궁화장(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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