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조병태 소네트그룹 회장… 붕괴위기에 놓인 월드옥타…차세대들에게 면목이 없다

president
By president 2016.11.03 16:24

■인물탐구/조병태 소네트그룹 회장… 붕괴위기에 놓인 월드옥타…차세대들에게 면목이 없다

인물탐구/조병태 소네트그룹 회장

조병태 소네트그룹 회장

붕괴위기에 놓인 월드옥타…차세대들에게 면목이 없다

 

월드옥타 9대 회장과 11차 세계한상대회장을 역임한 조병태 소네트 회장. 그의 소원은 늘 “월드옥타가 고국의 경제발전에 중심이 되는 한인 최대의 경제단체가 되는 일”이라며 “월드옥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늘 배가 부르다”고 말 하곤 했다. 한마디로 월드옥타는 그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조병태 회장(맨 오른쪽)

조병태 회장(맨 오른쪽)

이번 월드옥타 선거가 끝나자마자 회원들은 “품격의 옥타 선거를 기대했지만 물거품이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상당수 회원들이 회원탈퇴를 선언하거나 앞으로 19대 집행부 행사에 참석을 않겠다고 카톡방에 메시지를 남기는 등 갈등과 분열이 계속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병태 회장이 예견했던 우려가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번 선거전에 뛰어들었던 이청길 후보와 별개로 회원들이 집단으로 선관위 및 19대 집행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는 등 날 선 공방이 계속될 전망이다. 월드옥타 집행부는 엄연하게 선거중립을 서야 함은 불문가지. 하물며 삿대질까지 당했다. 그래서 조병태 회장은 선거 전부터 차봉규 후보의 양보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체 미국으로 떠나면서 “가슴이 아프고 시리다”고 했다. 그는 35년 된 월드옥타가 “원칙을 바로 세워야 월드옥타의 미래는 물론, 조국에 대한 봉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신이다. 월드옥타 행사장에 참석할 때마다 그의 패션이 늘 화제가 될 정도로 멋과 맛을 아는 그는 핸드볼 선수 출신이자 감독출신이다. 태권도 골프 등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가운데 차봉규 당선인은 갑자기 지난 10월20일 공식 사퇴했다. 선거 2주 만이다. 차봉규 당선인은 “선거로 인해 협회의 화합과 조화를 해치는 일이 더 이상 지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퇴를 다짐했다”고 밝혔다. 본지는 이번 투표에 앞서 지난 10월 6일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병태 회장이 월드옥타 회장 선거 유권자인 상임이사들에게 당부한 녹음파일을 입수해 게재한다. 늘 겸손과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조 회장의 애절함과 절절함이 녹아 있다.

 

“저는 상집위원들과 박기출 회장에게 옥타가 살길은 (이번)선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밖에는 수많은 언론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차세대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평소처럼)차세대들을 이끌어주는 그런 정신으로 오늘 이뤄질지(후보사퇴 ·양보)어떤 결과(선거진행)가 생길지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25년간 (월드옥타 대표자대회·경제인대회 등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옥타는 누구에 의해서 무너지면 안 됩니다. 옥타는 우리 모두 회원들의 것이고 상임이사들의 눈물과 명예회장들의 고뇌와 고난을 거쳐 오늘까지 왔습니다. 저는 일주일 전부터 잠 한숨 못자고 고민 고민했습니다. 우리 옥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오늘이 (선거)끝나고 100억을 만들든, 1000억을 만들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상임이사님들이 인지하시는 분도 있고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차봉규 후보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저는 차봉규 후보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정확한 결과, 그리고 마땅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때는 옥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이번이 (후보사퇴) 마지막 기회입니다. 차 후보께서 이 자리에서 옥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보)양보를 해주시면 우리 옥타는 살아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 옥타는 여기서 끝납니다. 여러분! 그것을 인지해주시고 상임이사 여러분들이 차봉규 후보에게 간곡하게 힘을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차봉규 후보는 젊고 후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인재입니다. 이 자리에서 정말 옥타가 하나되고 발전되기 위해 양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피와 땀으로 일군 월드옥타 무너지나

조 회장에게 있어 올해는 특히 남다른 해이기도 하다. 그가 1997년 9대 월드옥타 회장에 취임한지 올해로 꼭 20년째이기 때문이다. 당시 월드옥타는 10개 지회에 회원수는 100여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2016년 10월 말 현재 월드옥타는 전 세계 71개국에 141개 지회와 65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한인경제단체로 성장했다. 또한 13년 전부터 시작한 월드옥타 차세대무역스쿨들은 지금까지 1만8,000명이 수료해 글로벌 시대, 한민족의 경제영토를 넓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월드옥타가 ‘인재양성의 요람’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조 회장 역시 차세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는 열일 제쳐두고 나서기도 했다.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 뒤에는 그가 25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흘린 땀과 열정도 월드옥타의 불쏘시기가 됐음은 불문가지다. 차세대에서 빌게이츠나 스티븐 잡스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는 그의 반문이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월드옥타가 중국의 화상(華商)네트워크를 뛰어 넘는 조직이 되는 것. 하지만 이번 선거파동으로 조 회장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조 회장은 1991년 월드옥타와 인연을 맺은 뒤 1997년 월드옥타 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외연확보에 팔을 걷어붙였다. 2년간 자신의 사업도 내팽개치고 전 세계 동포 기업들 설득에 주력했다. LA를 필두로 워싱턴·애틀랜타·댈라스, 중국의 베이징, 영국,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지를 돌며 지회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출장과 행사 등 모든 경비는 자비를 털어 충당했다. 월드옥타 사랑이 곧 모국사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1997년 뉴욕에서 제1회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열었다. 27개국 35개 지회에서 550여명이 넘는 회원이 참석해 그의 진가를 전 세계 한인들에게 알렸다. 월드옥타 창립 이래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때마침 고국은 IMF금융위기가 닥쳤다. 1달러가 궁한 시기였다. 조 회장은 청와대로 달려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제2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한 배경을 설명했다.

조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월드옥타 회원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산 제품을 구매하는 한편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겠다”며 월드옥타의 모국사랑을 설파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다. 월드옥타 회원들은 모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펴왔다. 이런 정신은 모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회원들이 현지에서 지진이나 홍수 등 각종 재해가 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각종 성금은 물론 봉사활동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심어줬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고 났을 때도 현장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해 1억2800여만원을 모아 세월호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등 남다른 조국애에 앞장서왔다. 한국이 무역 규모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월드옥타 회원을 비롯한 동포 경제인들의 공로도 적지 않다.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미 땅 끝이나 아프리카 오지까지 누비며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수출 길을 뚫는 데 앞장서는 등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조병태 회장은

그는 잘나가던 핸드볼 선수이자 감독으로 활동을 하다가 그의 나이 28세인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에서 그의 형님이 운영하는 유풍실업에서 잠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모자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적지 않는 고난을 겪었다. 6개월간 500여개 업체를 돌아다니면 발품을 팔았지만 늘 빈손이었다. 죽을 고생을 하다가 드디어 가죽 모자 5만개 주문을 받아 납품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송하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생겨 20만 달러를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아야 했다. 수업료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금액이었다. 4인 가족이 한 달에 50달러로 버티던 그에게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막막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버텨볼 요량으로 바이어를 찾아가 “반드시 빚을 갚겠다”며 영주권을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모형제에게 손을 벌려 미국으로 돌아가 급한 불을 껐다. “더 이상 실패는 없다”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리고 가죽 모자의 실패를 거울삼아 린네(麻로 만든 모자)로 바꿨지만 또 다시 그는 10만 달러라는 거금을 날렸다. 참담한 실패였다.

이때 그는 이미 미국의 뉴욕 주 동부를 관통하는 허드슨 강가에 서 있었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한참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후련해졌다. 마음을 돌렸다. 학창시절부터 스포츠맨으로 살아온 집념의 승부가 바로 조병태 아닌가.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스포츠 모자에 눈을 돌렸다.

“어느 날 뉴욕의 42번가 타임스퀘어 광장을 걷고 있는데 광고판이 눈에 번쩍 들어왔어요. 순간 모자를 광고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모자에 말로 담배, 버드와이저 맥주, GM과 포드 등 자동차 회사의 로고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한마디로 대박을 친 것입니다. 2년간 진 빚을 다 갚았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시작은 미약했지만 이때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프린팅 모자에서 자수로 로고를 새기는 방식으로 늘 시장의 변화에 대처했다. 특히 1982년 개발한 자수 모자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까지 이 회사의 효자상품이 됐다. 소네트의 자수모자에 대한 입소문은 빨랐다. 뉴욕 양키즈에 연간 60만개를 공급하는 등 메이저리그(MLB) 각 구단에 모자를 공급하면서 회사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농구, 미식축구, 하키 등 미국의 4대 스포츠 팀들의 모자는 물론 IBM, 나이키,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 광고를 새긴 모자는 거의 소네트의 제품이다. 그는 그냥 모자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광고 모자를 만들어 시장을 재패한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늘 경쟁이 있는 법. 최근에는 뒤가 막혀 있으면서도 누구나 편하게 쓸 수 있는 ‘플렉스피트(Fiex Fit)모자를 개발해 다시 한 번 공전의 히트를 쳤다. 평소에도 그는 완벽한 시장조사를 통해 얻어낸 빅데이터를 비즈니스화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늘 시장을 지배하고 주도했다. 원텐(One-Ten)모자가 대표적이다. 저가 중국산이 미국시장을 할퀴고 있는 가운데 소네트가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 올수 없는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집념과 뚝심, 스포츠맨으로서의 리더십이 연간 2억 2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신화를 쏘아 올렸다. 1984년 LA올림픽과 88서울 올림픽 때 핸드볼 국제 심판을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가진 그는 뉴욕한인경제협회장과 월드옥타 회장을 거쳐 미주 이미 100주년 기념사회 뉴욕지역 공동회장 및 한상대회장을 역임했다.

 

 

조병태 회장의 경영철학

 

  1. 고객을 감동시키라. 돈을 버는 것 보다 사람을 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비스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 조 회장은 Ten-Ten-Ten 원리를 믿는다. 손님을 잡는데 10분 걸리면 놓치는 데 10초, 놓친 손님을 다시 잡는데 10년이 걸린다는 원리다. 조 사장은 영국의 Bentham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인 Utilitarianism의 정신을 좋아한다. 업주와 고객과 사회에 서로 유익한 선에서 대인관계를 유지한다.
  2. 한 우물을 파라. 위기를 미리 대비하면서 참고 견디며 독한 마음으로 미래를 보며 대비해야 한다. 끝없는 새 상품 개발로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며 시대를 앞서는 경영 마인드를 갖기 위해 항상 전문지식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3. 큰 꿈이 있는 자는 큰 믿음을 가져라.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꿈이 클수록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초인간적인 힘을 믿는 믿음이 요구된다.
president
By president 2016.11.03 16:24
댓글작성

댓글없음

댓글없음!

이 기사에 관하여 첫번째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댓글작성
댓글보기

댓글작성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표시는 필수입력입니다.*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