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네트워크/ 제79차 재외동포포럼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 초청 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애환의 역사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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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3.17 17:56

■한민족네트워크/ 제79차 재외동포포럼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 초청 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애환의 역사를 아시나요?

한민족네트워크/ 제79차 재외동포포럼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 초청 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애환의 역사를 아시나요?

재외동포포럼 제5대 이사장으로 선출된 조롱제 이사장

재외동포포럼 제5대 이사장으로 선출된 조롱제 이사장

어두웠던 식민지시절, 머나먼 소련 땅에 흩어져 살면서 동포와 이방인들에게 민족문화를 알린 예술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말로 된 연극과 가요 등을 공연하면서 마침내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도 인정하는 예술인단체로 거듭나 오늘의 고려극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재외동포 포럼(이사장 조롱제)이 2월 1일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전 카자흐스탄 한글학교장)을 초청, 국회의원회관에서 강연을 열었다. 이날 김 소장의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전파자’라는 주제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다.

김지태 기자

 

김병학 소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고려인들의 희곡이 풍부한 토속어와 방언, 다채로운 속담과 구어체 관용구, 러시아어를 직역한 모조어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충분히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고려인들은 모국어 연극과 노래 전파를 통해 민족성과 모국어를 지킬 수 있었다”며 “올해 2017년은 고려인 이주 80년이자 고려극장 창설 85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30년대 이국 땅에서 고려인 문화를 발전시킨 고려인극장

원동 고려인극장은 1932년 9월부터 1937년 9월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며 고려인 문화를 전파한 집단이다. 창단 당시부터 고려인극장은 조선신파숙청단, 김니꼴라이연주단, 신한촌구락부연예부, 조선중학연예부 등 예술단과 함께 활약하며 널리 이름을 알렸다. 정치적,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단원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공연을 이어갔다. 단원이 부족해 1인 다역을 맡았고, 월급을 반납하는 것은 물론 가재도구를 무대 소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처절하게 극장을 이어오면서 <동북선> <춘향전> <심청전> <장한몽> 등을 탄생시켰다.

원동 고려인극장의 최대 위기는 소비에트 정부가 강제이주정책을 실시하면서 비롯됐다. 강제이주에 따라 단원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나뉘어 이주되면서 극장도 두 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특히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극장들은 주요 문화예술단체와 학술기관이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서 물적, 인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타쉬켄트 조선극장도 열악한 환경에 처해졌으나 순회공연 지역을 확장하는 등 1950년까지 활동을 이어나갔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는 호레즘 주립 조선극장이라는 우리말 극장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으나 1942년에 타쉬켄트 조선극장으로 통폐합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극장의 도약과 번영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극장은 전쟁부상자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활발하게 벌였다. 칼춤, 한산춤, 우리말과 러시아어로 된 전시가요 등이 주요 레파토리였다. 1946년부터 조정구씨가 극장장을 맡으면서 단원들의 주거와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을 시작했고, 극장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변화했다. 한편 타쉬켄트 조선극장 배우들과 북한파견 노무자들을 중심으로 사할린 조선극장이 운영됐다. 이 시기에 정인묵 등 무대예술 전문가와 만능 연극인인 김해운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오지를 다니면서 <홍길동> <장화와 홍련> 등을 공연했는데 아쉽게도 196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은 순회공연 지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극장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55년 수도 알마티에서 시작한 순회공연은 카프카스, 모스크바 공연까지 이어지면서 1964년에는 공화국적 지위를 획득한 조선극장으로 위상을 높였다. 1956년 타쉬켄트 극장대학에 조선배우과가 개설됐고 1960년에 첫 졸업생 14명을 배출했다. 이들이 극장에 들어오면서 고려인극장은 2세대 배우들로 인한 도약을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이후 고려인극장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60년대 초반, 프로 극작가 한진과 전문연출가 맹동욱이 등장하면서 공연작품들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1982년 9월에는 극장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모스크바에서 <산부처> <지옥의 종소리> <춘향전> 등 수작들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 아리랑 가무단이 소련 전역에 이름을 알렸고, 1982년에 극장 역사를 총정리한 <소비에트 고려극장(김 이오씨프 저)>이 출간되기도 했다.

 

고려인극장, 뼈아픈 쇠락의 역사

80년대를 넘기면서 극장에는 모국어를 할 줄 아는 배우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때부터 고려인극장의 쇠락이 시작됐다. 극작가는 2대에서 사실상 맥이 끊겼고 배우들의 기량도 떨어졌다. 모두가 모국어 문화가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모국어 가요가 사라지면서 모국어 가수의 공연기회도 줄었고, 가요 작사자 및 작곡가의 창작열도 사그라지는 등 극장은악순환을 거듭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면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고 극단과 가무단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고려인 원로들은 정부에 건물 제공을 요청해 극장은 1999년 알마티 한국교육원 대강당으로 임시 입주해 위기를 모면했다. 임시건물에 있으면서 극장은 <기억> <나무를 흔들지 마라> 등의 작품을 공연했다. 2003년 가을에 들어서야 새 극장건물에 입주하면서 오늘날 고려극장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됐다.

 

재외동포신문 주최 2016 올해의 인물상

이날 포럼에 이어 재외동포신문이 주최하는 2016 올해의 인물상 수상식이 있었다. 제14회째를 맞는 올해의 인물상에는 고상구 하노이 한인회장(한인회 부문), 정영수 CJ 글로벌 경영 고문(한인경제 부문), 원희룡 제주도지사(정치·행정 부문), 손창현 나의꿈국제재단 이사장(교육 부문), 권태일 재외한인구조단 단장(사회봉사 부문), 송효숙 WCN 대표(문화·예술 부문), 그레이스 김 KAC창설이사(특별 부문) 등 7명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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