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①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동문들은 김희수 전 이사장에게 큰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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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3.23 13:55 Updated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①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동문들은 김희수 전 이사장에게 큰 빚을 졌다”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동문들은 김희수 전 이사장에게 큰 빚을 졌다”

 

“찬연하고 빛나는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의 편우(片隅/작은 조각만한 모퉁이나 구석진 곳)를 비추고 싶습니다”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이 80년대 후반 중앙대를 인수한 뒤 일본의 동포신문인 <통일신문>에 실은 광고 카피다. 평생을 인재양성에 바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담긴 대목이다. 본지는 3차례에 걸쳐 김희수 전 이사장의 발자취를 게재한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②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③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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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6일 한국경제신문이 김희수 전 이사장 별세 5주년에 맞춰 <배워야 산다>는 평전을 출간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세 때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공사장 막노동을 전전하며 학비를 벌어 어렵사리 중등학교를 졸업 한 뒤 양품점 가게로 첫 사업을 시작한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80년대 들어 동경에 23개 대형빌딩을 소유하는 부동산 재벌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대략 그의 자산이 수조원에 이른다는 뉴스도 적지 않게 보도됐다. 이로 인해 재일동포사회는 물론 일본인들로부터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일군 부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통용되는 요행이나 트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갖은 냉대와 차별을 뚫고 정직과 신뢰를 기반으로 얻어낸 값진 성과물이었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윤리 및 정도경영을 이미 70년 전에 시작했던 것이다. 한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나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과 함께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이들과 달리 그는 늘 갈증을 느끼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 온 한국 유학생들을 통해 그토록 목말라하는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유학생들에게 통 큰 기부는 기본. 늘 유학생들의 가정사를 챙기고 손을 잡아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국에서 외롭고 힘들게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아버지가 되고 스승이 되고자 했다. 여느 사업가들에 비해 돈을 쓰는 방법이 특이했던 것. 배움의 ‘한(恨)’, 가난의 ‘한(恨)’, 망국의 ‘한(恨)’이 대물림돼서는 안 된다는 그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배우지 못해 나라를 빼앗긴 채 온갖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아야 했고, 가난 때문에 늘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으며, 나라 잃은 백성으로 태어난 죄로 이국땅에서 온 가족이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한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에서 이런 주홍글씨를 지우는 일이야말로 돈을 버는 일보다, 더 절박하다고 생각했던 김희수 전 이사장. 그래서 그는 한풀이의 방점을 ‘인재양성’에 두었다. 그리고 그의 모국, 조국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 민족이 개인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토대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그는 “내가 죽은 뒤 돈을 남길 것인가, 사람을 남길 것인가 고민하다가 조국의 인재양성이야말로 세 가지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恨)’을 한풀이로 그치지 않고 집요한 생명력을 통해 민족애로 승화시킨 김희수 전 이사장. 한마디로 영혼이 있는 교육자이자 봉사자의 길을 개척한 교육 프론티어였다.

 

영혼이 있는 교육 봉사자

김희수 이사장은 80년대 초부터 최적의 인재양성의 요람을 만들기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했지만 군부독재시절 대학설립이 용이하지 않았다. 학원민주화의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모든 여건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1987년 중앙대학교는 부도직전으로 몰렸다. 급기야 중앙대 전 이사장이 일본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당시 중앙대 1년 예산이 200억원. 하지만 부채가 무려 713억원에 이르는 등 부실투성이었다. 중앙대 전 구성이 4년간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모아야 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격 중앙대를 인수했다. <배워야 산다>는 평전에 중앙대 인수 배경이 세 가지로 압축돼 있다.

첫째, 70년 역사의 중앙대가 부도나 문을 닫게 되면 국가적 손실이며 학교 공동체는 사회와 국가가 모두 끌어안아야 할 국가 자산이다.

둘째, 당시 중앙대는 부도위기에다 군사정권의 어수수한 정국에서 각종 시위로 학원가가 몸살을 앓고 있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부채 또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꼭 인수를 해야 했다.

셋째, 88년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고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뒤 그는 중앙대를 찾았다. 학교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직 이사장의 비리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패배주의 빠진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간 모아둔 현금을 비롯해 빌딩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중앙대 빚을 모조리 갚았다. 인수 과정에서 가짜어음을 변재해주고 출처가 불투명한 재단 측 사채까지 정리해주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전 교직원들에 대한 고용승계도 했다. 더 큰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9월 12일 그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진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양성에 열정을 보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뛰고 벅찼다. 그리고 중앙대 관계자들 앞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겠다는 약속도 했다. 취임 후 우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짓고 도서관을 넓히는 것은 물론 체육관, 실습실 등 교육환경개선에 주력했다. 또한 전 중앙대 식구들의 월급을 올려주고 학생회관 및 전산센터, 예술대학 증축 등 일본에서 피 땀 흘려 벌은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인재양성’이라는 거대한 그의 꿈도 잠시, 그는 학원민주화의 열기에 편승한 교직원들과 전임 이사장 측의 계략에 발목이 잡혔다. 이사장도 모르게 학교 측의 일방적인 마스터플랜이 판을 쳤다. 당시 2-3000억원도 모자랄 판이었다. “돈 문제라면 이사장이 모두 해결해 줄 거다”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당시 김 전 이사장은 돈 찍어내는 기계였다. 급기야 일본에 있는 김 전 이사장의 재산공개까지 요구했다. 전임 이사장측은 “김 전 이사장에게 억울하게 학교를 빼앗겼다”며 김 이사장을 부동산 투기꾼으로 몰아세웠다. 총장실과 이사장실도 점거 당했다. 김 전 이사장을 궁지로 몰아 일본으로 쫒아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일부 학생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김희수 이사장을 일본 국세청에 고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기업과 대학은 다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김 전 이사장은 1988년 한 세미나에서 “저는 앞으로 목숨을 걸고 중앙대학교를 운영할 것이다. 중앙대학이 일류대학이 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도 없다”며 “5년간 9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후에도 10년간 수천억원을 중앙대에 쏟아 부었다. 이런 그의 집념은 결국 IMF라는 직격탄과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중앙대의 재정적 뒷받침을 하던 일본의 회사들마저 위기로 몰리게 된다. 이렇게 되자 중앙대 이사진들은 또 다시 발끈했다.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마저 폐교하라고 아우성을 쳤던 것. 신경호 국사관대학교 교수이자 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의 회고다.

“일본에 남아 있던 학교도 부도직전이었습니다. 경기침체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한국과 중국의 학생들마저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최종목표는 김희수 전 이사장을 한국에서 쫒아내기 위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과정에서 김 전 이사장은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채근했다. 한국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중앙대를 인수하고 이어서 전직 이사장의 측근들까지 모조리 고용을 승계한 것이 화근이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8년 중앙대학은 결국. 두산그룹으로 넘어간다. 중앙대를 졸업한 한 관계자는 “만약 중앙대 전 구성원들이 조금 더 인내를 가지고 김 이사장의 생각을 존중했다면 현재의 중앙대와는 질적 양적인 면에서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며 “8,90년대 중앙대 동문과 교직원들은 고 김희수 이사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중앙대를 인수한 박용성 이사장은 언론을 통해 “중앙대라는 이름만 빼고 모두 바꾸어 동양의 MIT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배워야산다>의 저자인 유승준 작가는 김 전 이사장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 김 전 이사장은 유 작가에게 “기업과 대학은 다르지요”라는 짤막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이 그와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그는 며칠 뒤 뇌경색으로 쓰러져 1년8개월 혼수상태로 병마와 싸우다가 동경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병원생활도 서민용 2인실에서 보낸 그는 동경 외곽에 위치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립 하치오지 영원 묘지로 돌아갔다. 평소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살아생전 근검과 절약의 표상을 보여줬던 고 김희수 전 이사장. 살아서는 우리 민족의 한을 민족애로 승화시키고, 죽어서는 화해와 용서로 한(恨)을 푼 이시대의 진정한 의인이었던 것이다. 현재 중앙대에는 김희수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영웅을 만들지 않는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현재 김 전 이사장이 남긴 재산은 거의 없다. 다만 중앙대 인수보다 앞서 동경에 세운 수림외어전문학교와 한국의 수림문화재단이 김 전 이사장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배워야 산다>는 평전에 나온 대목이다.

“김희수 이사장은 한국 사회에 대학을 너무 모른 탓에 자신의 진심과 열정만 믿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대학은 돈과 인맥으로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는 이를 빨리 파악하여 한국 내 인맥을 구축하고 우군을 확보했어야 하는데…한국은 된장찌개를 먹고 관사에 머물며 전철을 타고 다니는 진정한 부자를 이해하고 알아줄 만큼 격조와 품위를 갖춘 사회가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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