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 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정직과 신용으로 일본사회를 감동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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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4.03 18:18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 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정직과 신용으로 일본사회를 감동시키다”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정직과 신용으로 일본사회를 감동시키다”

 

찬연하고 빛나는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의 편우(片隅/작은 조각만한 모퉁이나 구석진 곳)를 비추고 싶습니다”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이 80년대 후반 중앙대를 인수한 뒤 일본의 동포신문인 <통일신문>에 실은 광고 카피다. 평생을 인재양성에 바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담긴 대목이다. 본지는 3차례에 걸쳐 김희수 전 이사장의 발자취를 게재한다.

①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②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③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고 김희수 전 이사장이 일본 동경의 요지인 긴자에 세운 금정빌딩

고 김희수 전 이사장이 일본 동경의 요지인 긴자에 세운 금정빌딩

“흔히들 부동산업을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남들이 쉽게 일할 때 우리는 어렵게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금정(金井)이 있게 된 것입니다”

김희수 전 이사장이 1981년 11월10일 동경시내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금정기업 창립20주년 기념행사에서 밝힌 말이다(배워야 산다/유승준2017). 그의 기업가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김희수는 늘 남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요즘말로 블루오션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성공할 수는 없는 법. 김 전 이사장의 성공은 블루오션이나 땀과 열정보다 갖은 냉대와 차별을 뚫고 일어섰다는 점이 남다르다. 부동산업에 뛰어들기 전 잠시, 철강 사업을 했던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피 똥을 싸가면서 막노동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양품점 가게를 열어 벌은 종자돈으로 철강 회사를 세웠다. 전후 복구에 따른 철강수요에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어느 업종보다 철강사업 전망이 밝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독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하고도 거대한 목표가 있었다. 다름 아닌 가난과 망국‧그리고 배움의 한(恨)을 풀겠다는 명확한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업의 첫 발을 떼기도 전에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일본정부가 철강업에 종사하는 제3국인에게는 은행융자를 해주지 말라고 틀어 버린 것. 캐시플로우가 원활하지 않으면 사업은 그야말로 모래성일 수밖에 없다. 일본정부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철강 사업을 접어야 했던 김 전 이사장. 결국, 철강 회사를 5,000만엔에 매각한 뒤 궁리 끝에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고 동경 최대의 번화가인 긴자에 땅을 샀다.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었다. 게다가 융자도 쉽지 않았다. 철강업처럼 융자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은행융자를 받을 경우, 일본인은 보증인이 한명이면 가능했지만 한국인은 여러 사람의 보증인을 세우고도 담보까지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눌러 앉을 수만은 없는 노릇. 신발이 닳아질 정도로 은행문턱을 들락거린 끝에 어렵게 융자를 얻어 금정기업주식회사 1호 건물을 올렸다. 1961년,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렇게 시작한 부동산업은 창립 20주년인 1981년도에 김 이사장 건물이 13개, 창립25주년 때에는 동경의 노른자위의 땅위에 23개의 메머드급 빌딩을 소유하면서 재벌의 반열에 올라서는 금자탑을 쌓게 된다. 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터진 석유파동은 역설적이게 일본경제를 튼튼하게 만들면서 일본의 부동산은 말 그대로 눈만 뜨면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정확하게 김 전 이사장의 자산을 파악하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일본 동경의 긴자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땅 값이 비싼 지역이다. 일부에서는 그의 재산을 30조원 정도로 예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지만 그는 7평짜리 비좁은 방에서 비즈니스를 일으키고 40년 넘은 집기를 고집했다. 전철로 출퇴근을 하고 비행기도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식사도 된장찌개 한 그릇이면 족했다. 집에도 그 흔한 파출부 한명 두지 않았다. 유독 자신에게 만큼은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 짠돌이었지만 그럼에도 한국 유학생이나 젊은 일꾼들에게는 늘 따뜻함과 통 큰 배려로 자신의 사랑을 대신했다.

 

중앙대 인수 전후의 아픈 과거 담긴 금정1빌딩

지난 3월 18일 기자는 신경호 고쿠시칸대 교수의 안내로 1961년 김희수 이사장이 세운 금정1빌딩을 찾아갔다. 건평이 대략 5-60평정도로 보인 금정1빌딩은 주인을 잃은 듯 따뜻한 온기라곤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김희수 이사장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층에 ‘금정기업주식회사본사긴자 제1금정빌딩’이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하 2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와인가게와 술을 파는 바(bar)가 들어서 있었다. 김희수 이사장이 사용했다는 비좁은 사무실을 보기 위해 6층으로 올라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층과 층 사이에는 최소 50년 전에 쓰여 진 것으로 보이는 금정기업주식회사, 국제환경설비주식회사, 금성관제주식회사 등의 안내판이 주인을 기다리는 듯, 쓸쓸하게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1층부터 6층까지 올라가는데 숨이 찼다. 30대 후반에 둥지를 튼 김희수는 30년 넘게 매일매일 이 계단을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꿈을 꾸었을까?

김 전 이사장의 이 비좁은 사무실에는 전임 중앙대 이사장부터 교수, 중대 출신 정치인 등 수많은 학교 관계자들이 들락거렸다. 부도직전의 중앙대를 인수해달라고 목을 맸던 사연 많은 곳이다. 그러나 정작 중앙대를 인수하고 나자 그들은 갖은 모략과 술수로 김희수를 괴롭혔다. 일본에 남아 있는 재산마저 강탈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고 한다.

이만이 아니다. 일부는 중앙대 운영을 정상적으로 하려면 뒷돈이 필요하다고 거래를 요구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고 후문이다. 이미 돈의 노예가 된 중앙대 관계자들은 그렇게 비열한 속살을 드러냈다. 기자의 가슴도 먹먹해지는가 싶더니 울컥하기까지 했다. 배움의 한(恨)과 가난의 한(恨), 그리고 망국의 한(恨)을 풀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한 사업가는 그렇게 외롭게 모진 세월을 버티다가 2012년 영면에 들어갔다.

신경호 고쿠시칸대 교수는 “1961년 김희수 이사장님께서 입주 당시 들여 놓은 사무실 집기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여기서 유학생들에게 봉투를 건네며 격려하시던 이사장님의 모습이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 교수는 1983년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해 11월 김희수 전 이사장을 만났다. 2012년 김 전 이사장이 별세하기 전 까지 평생을 동거동락해 왔고 현재는 고쿠시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 전 이사장의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부동산업은 제조업이다

“아파트든, 공장이든, 상가든, 해당 지역에 꼭 있어야 할 건물을 제때에 제대로 지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필요와 용도에 맞게 그 공간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편리하게 보수 관리를 해주는 사업이 바로 부동산업입니다”

<배워야 산다>의 평전에 나온 이야기다. 김 이사장이 부동산업도 제조업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평생 빌딩을 지은 후 땅이나 건물의 가격이 아무리 올라가도 그것을 되팔아 이윤을 남기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기존 건물을 매입해서 임대도 하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수많은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김 이사장에게 찾아와 건물을 팔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투기로 돈을 벌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부동산업에 뛰어들 당시, 콧대 높았던 은행들도 김 이사장의 이런 정신을 높이 사 그에게 찾아와 오히려 융자를 권할 정도가 됐다. 그는 사업성공의 비결로 ‘정직과’ ‘신용’을 꼽았다. 여기에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늘 솔직하고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며 살아왔다. 동경전기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면서 성공하기에는 어려우니 귀화를 하라”는 지도교수의 제안도 수차례 받았지만 그는 매번 단칼에 거부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조국을 등질 수 없다는 그만의 소신 때문이었다.

“대개 장사치는 먼저 자기 이익을 취한 뒤에 나머지를 손님에게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큰 장사꾼은 먼저 손님에게 혜택을 주고 나서 그 나머지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업가이자 올바른 기업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워야 산다>는 평전에는 김 전 이사장이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각 층의 문을 열고 들어가 “불편한 사항은 없느냐. 전기와 수도는 괜찮으냐 등등 고객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보였다”고 기록돼 있다. 입주자들이 내 집처럼 편안하게 일하고 쉴 수 있는 빌딩을 만드는 것이 그가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평생을 지켜온 신조였다. 어느 날은 시청에서 수도관 공사를 하다가 사고가 나 금정빌딩의 수돗물이 끊기게 됐다. 김 전 이사장은 직접 자신의 회사 소속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시청공사를 대신 해주기도 했다. 당시는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어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거나 갑자기 전기가 끊어지고 가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김 전 이사장은 건물 내에 기술자들을 상주시켜 놓았다가 사고가 나면 즉시 출동하게 하는 등 고객서비스에 만전을 기했다. 경제적인 측면서는 비효율적이었지만 그는 돈 보다 고객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 투자를 했다. 간혹 임대료를 못내는 세입자에게도 냉혹하게 몰아세우지 않고 오히려 뭔가 도움을 줘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이렇듯, 고객을 향한 그의 무한 서비스는 입소문을 타고 긴자를 휘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정빌딩에 입주하려는 세입자들이 장사진을 쳤다. 그는 이미 57년 전 부터 인간을 위한, 인간의 편리와 행복을 위한 공간을 만들면서 성공신화를 쓴 것이다.

 

초등학교시절에 눈뜬 민족교육

김희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0년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집안도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물려준 토지가 있어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일제가 들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바깥세상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김희수의 작은 아버지에 이어 아버지와 형을 일본으로 보낸다. 머지않아 어머니도 뒤따라간다. 할아버지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 가족들을 호랑이굴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래서 김희수는 할아버지에게서 말을 배우고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천자문을 익혔으며 자연과 인생, 더 나아가 삶의 원리도 조금씩 배웠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이자 친구였으며 스승이자 멘토였다.

“애비나 형처럼 너도 커서 일본으로 가 배워야 한다. 이제 배워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할아버지는 김희수에게 이렇게 주문처럼 손자를 아우르면서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 주셨다. 또한 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과 꿈을 심어줬다. 1924년 6월 19일 경남 창원군 진동면 교동리에서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김희수는 1933년 진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사는 일제의 칼을 옆구리에 차고 일본말과 일본의 역사를 주로 강의했다. 선생님이 아니라 군인이었던 것이다. 4학년 때 즈음 김희수는 한국인 선생님을 만나면서 어린 나이지만 민족교육에 눈을 뜬다. 선생님은 칼 대신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희수를 대했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또한 나라를 잃고 고생하는 이유를 들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의 평생 화두였던 ‘교육’은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보여 지는 대목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만 14살에 김희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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