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김희수 새는 뼛속을 비워야 하늘을 날 수 있다

president
By president 2017.05.02 14:24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김희수     새는 뼛속을 비워야 하늘을 날 수 있다

노블레스오블리쥬/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김희수 

새는 뼛속을 비워야 하늘을 날 수 있다 

 

찬연하고 빛나는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의 편우(片隅/작은 조각만한 모퉁이나 구석진 곳)를 비추고 싶습니다”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이 80년대 후반 중앙대를 인수한 뒤 일본의 동포신문인 <통일신문>에 실은 광고 카피다. 평생을 인재양성에 바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담긴 대목이다. 본지는 3차례에 걸쳐 김희수 전 이사장의 발자취를 게재한다.

 

① 배움․가난․망국의 恨을 민족애로 승화시킨 고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

②김희수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③공수래공수거 실천한 무소유의 영웅

 

그는 하늘을 나는 철새였다. 열 네 살의 나이에 그의 고향 마산에서 일본으로 철새처럼 날아들었고 사업가로 성공한 뒤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날아가는 철새가 됐다. 철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뼛속을 비워야 하듯, 그는 늘 뼛속을 비웠다. 그의 모든 재산도 사업도 남기지 않았던 것. 죽는 날까지 ‘사람을 남기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삶을 실천했다. 그는 죽어서도 한 평도 되지 않은 도립 하치오우지 영원(八王子靈園)에 묻혔다. 다음은 <배워야산다>의 평전에 나온 내용이다.

“다음 세대에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인생의 하(下)이며,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중(中)이고, 사람을 남기는 것은 상(上)으로 최고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그는 사업을 통해 돈을 벌고자 했던 것도 사람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됐다.

김 전 이사장은 2008년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넘기면서 1200억원을 기부 받았다. 엄청난 규모의 돈이지만 단 한 푼 직계 자녀나 친인척들에게 남기지 않고 전액을 재단설립 기금으로 내 놓았다. 2009년 설립된 수림문화재단이 바로 그것이다. 중앙대를 넘기기 전 그의 아내 이재림 여사가 한마디 했다.

이 여사는 “당신의 인생 전체를 바친 거나 다름없는 중앙대를 이런 식으로 물러나면 어떻게 하느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전 이사장은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오. 이제는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전격적으로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넘겼다. 어느새 그의 나이도 80세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분명 나설 때와 물러 날 때를 아는 결단의 소유자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뒷모습이 추하게 보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희수 전 이사장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났다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런 인생길에서 예외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김 전 이사장의 호는 동교(東橋). 유목상 전 중앙대 교수가 지었다. 한국의 동쪽인 일본의 동경으로 건너가서 갖은 고난과 풍상을 이겨내면서 거목으로 자랐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홋가이도에 30여년 간 보살핀 조림지가 있다. 그가 금정기업을 창업한 뒤인 196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600정보(1정보 3,000평)를 사들여 회나무와 삼나무 등을 심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마다 이곳을 들렸다. “경제성도 없는데 왜 이렇게 정성을 다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무를 키우는 것이 사람을 키운다는 느낌이 들어 자주 찾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회전_20170317_142132

카스테라 빵을 좋아했던 김희수

지난 3월 17일 기자는 김희수 전 이사장이 잠들어 있는 동경에서 70km가량 떨어진 도립 하치오우지 영원(八王子靈園)으로 달려갔다. 신경호 이사와 함께 그의 아내, 직원 등 4명이 동행했다. 3월의 찬 공기도 벚꽃향기를 밀려 물러나고 있었다. 영원 입구에 들어서자 화재주의라는 안내판과 함께 향을 피울 수 있은 단과 수도꼭지가 달린 우물가, 그리고 양동이와 주걱이 준비돼 있었다. 무엇보다 공동묘지의 규모에 놀랐다. 대충 잡아 수만평이 족히 넘을 듯 보였다. 총총 걸음으로 신 이사는 김가(金家)라고 쓰여진 비석 앞에 서서 “여기가 김 전 이사장님의 묘비”라고 안내했다. 반 평이 채 되지 않게 보였다. 한때 수 조원을 거머쥔 성공한 재일동포 기업가의 묘비라고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죽어서도 청빈함과 절제를 보인 진정한 스승이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비석 뒷면에는 김 전 이사장의 부모 이름과 출생 및 사망일자가 나란히 적혀 있다. 옆면에는 ‘一九八七 吉日 金熙秀 建之’라고 쓰여 있었다. 신 이사는 “이때가 김 전 이사장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 아닐까”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당시는 김 전 이사장이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중앙대를 인수한다는 사실 하나로 가슴 벅찼던 시기다. 김 전 이사장은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으로 2년 남짓 활동을 하다가 2010년 잠시 일본에 들렸다가 쓰러졌다. 뇌경색에 실어증까지 겹쳐 1년 8개월 동안 요양원과 2인실 서민병원을 전전하다가 2012년 1월 19일 동경의 한 작은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신 이사가 “이사장님! 신군이 왔습니다. 편안하시지요? 서울에서도 손님이 오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묘비위에 물을 뿌렸다. 김 전 이사장은 살아생전 늘 신 이사를 ‘신군’으로 불렀다. 신 이사는 열흘 전에도 참배를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신 이사는 아내와 함께 준비해간 꽃과 소주, 그리고 카스테라 빵을 제단에 놓고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김 전 이사장은 살아생전 유난히 카스테라 빵을 좋아해서 준비했다고 한다. 1988년 일본에 있는 수림외국어전문학교 1기생인 신 이사의 아내는 이날 종종 먼 하늘을 쳐다보고 김 전 이사장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했다. 신 이사는 기자에게도 “한잔 올리라”고 권했다. 뜻하지 않게 이역 땅의 한 공동묘지에서 김 전 이사장에게 잔을 올리고 음복(飮福)까지 하게 됐다. 편백나무 숲에서 새들의 합창소리가 공원 주위를 울렸다. 현해탄을 건너던 철새가 이날 참배객을 환영이라도 하는 걸까. 현재 김 전 이사장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이 모셔진 고향의 선산에도 김희수의 묘지가 조성돼 있다. 후세들이 이국땅에서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고향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신경호 이사를 비롯한 직원들이 매년 김 전 이사장의 고향을 찾아 참배한다.

2009년 8월에 리모델링 및 증축을 완료한 김희수 전 이사장의 꿈이 담긴 중앙대도서관. 3,400여석의 열람석, 스터디룸, 튜터링룸 등의 학습시설과 E-lounge, CAU-Garden, CAU-lounge, 전자신문 및 전자게시판, 전자 메모보드 등 다양한 편의시설, 그리고 국회 전자도서관 원문 DB와 본교 소장 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 복합공간 Information Commons가 있다.

2009년 8월에 리모델링 및 증축을 완료한 김희수 전 이사장의 꿈이 담긴 중앙대도서관. 3,400여석의 열람석, 스터디룸, 튜터링룸 등의 학습시설과 E-lounge, CAU-Garden, CAU-lounge, 전자신문 및 전자게시판, 전자 메모보드 등 다양한 편의시설, 그리고 국회 전자도서관 원문 DB와 본교 소장 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 복합공간 Information Commons가 있다.

국내 유일의 부채 없는 대학 만든 김희수

1987년 부도직전의 중앙대를 인수하자마자 중앙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민주화열풍에 힘입어 학원가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10여 년간 수천억을 쏟아 부었다. 와중에 IMF까지 터졌다. 첩첩산중이었다. 어렵사리 고비를 넘기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일본에서는 거품경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교직원들은 갖은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돈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무리하게 일본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게 화근이 됐다. 결국, 일본 내 그의 자산은 빈 깡통이 되어 돌아왔다. 게다가 중앙대의 젖줄역할을 하던 금정상호신용금고도 파산으로 몰렸다. 믿고 맡겼던 CEO가 부당대출 및 횡령을 일삼은 것이다. 인재양성에 대한 그의 신념은 이렇게 배신과 음모 속에서 주저앉게 된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사람을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중앙대를 인수한 뒤 22년의 삶은 그에게 고통과 고난의 시기였던 셈이다. 신경호 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의 증언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매번 제가 공항에 마중을 나갔어요. 그런데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던 분이 어느 날부터 기내에서 서비스하는 와인을 한잔씩 드시고 오셨어요.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여쭈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한숨만 쉬시는 거예요.”

김 전 이사장은 2007년 더 이상 중앙대를 이끌어갈 힘이 없음을 알고 극비리에 여러 기업을 물색했다. 조건은 단 하나, 중앙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무엇보다 교육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이 나섰다. 2008년 초 이명박 당선자, 김희수 이사장, 박범훈 총장은 모처에서 회동한 뒤 중앙대는 전격적으로 그해 6월 두산그룹으로 넘어간다. 김 전 이사장은 자신의 시대는 지났고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대학의 운명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과 소명의식을 가진 기업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앙대의 미래를 위해서 집착도 미련도 거두었다. 박 전 총장은 중앙대가 두산으로 넘어가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중앙대 총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한때 중앙대의 실세였다. 갖은 술수로 모략으로 김 전 이사장을 힘들게 했다. 중앙대 총장을 그만두고 20011년부터 2013년까지 청와대 교문수석으로 근무한 뒤 2015년 특혜외압 및 뇌물수수로 현재 구속 중에 있다.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하면서 김희수 전 이사장에게 내민 돈은 1200억원. 당시 중앙대 및 관계사의 자산만도 3조5,000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특히 김 전 이사장이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넘길 당시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 한 푼의 부채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 “정치적 외압이 아니냐”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중앙대의 위상은 어떤가? 또한 김 전 이사장이 그토록 갈망했던 교육입국의 꿈은 진행 중일까?

 

어린시절, 가난은 운명인가?

일제시대 가난은 우리 민족에게는 떨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김희수 집안도 일제의 수탈로 인해 기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가난이 한이 됐고 나라 잃은 설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모두 일본으로 보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운명은 극복될 수 있는 거라고…그래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열 네 살 때 일본으로 들어온 김희수는 조센징과 한도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유배달과 신문배달, 각종 외판원에 잡일을 하는 등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대학공부까지 마쳤다. 김희수 역시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새기며 고단한 청춘을 보냈다. 1945년 민족의 염원인 해방이 됐지만 살길은 막막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으니 살아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경제는 최악이었다. 김희수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질게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한국행을 거부했다. 자녀들의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김희수는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 일했다. 때로는 소변에서 피오줌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돈을 모아 김희수는 동경시내 한복판에 금정(金井)양품점을 열었다.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그는 여기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래서. 다시 중단했던 학업을 시작했다. 1949년 동경전기대학교에 입학했다. 집과 학교 양품점을 운영하며 그야말로 그의 삶은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잘 수 없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는 이때가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날이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형님과 함께 어군 탐지기 사업에 이어 철강업을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철강 회사를 매각한 종잣돈 5000만엔으로 부동산 사업을 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한때 20여개가 넘는 대형 빌딩이 한국으로 치면 명동거리를 비롯해 노른자위 땅에 들어섰다. 여기서 벌은 돈으로 중앙대를 인수, 22년간 경영을 하다가 2008년 중앙대에 넘겼다. 이후 수림문화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에 취임한 뒤 조국의 등불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다 2012년 1월 19일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을 내리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끝>

president
By president 2017.05.02 14:24
댓글작성

댓글없음

댓글없음!

이 기사에 관하여 첫번째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댓글작성
댓글보기

댓글작성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표시는 필수입력입니다.*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