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정룡의 조선족 엿보기(下)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족의 ‘족(族)’은 차별이 아니라, 법적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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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6.02 17:07

■특별기고/ 김정룡의 조선족 엿보기(下)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족의 ‘족(族)’은 차별이 아니라, 법적 지위

특별기고/ 김정룡의 조선족 엿보기(下)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족의 ‘족(族)’은 차별이 아니라, 법적 지위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 그저 막연하게 중국에 살고 있는 같은 핏줄 정도로만 알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호칭도 아직까지 통일되지 못하고 ‘중국동포’, ‘중국교포’, ‘조선족’ 등으로 부른다. 한국인은 조선족을 중국동포 혹은 중국교포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하지만 조선족을 조선족이라 부르기를 꺼려하고 있다. 즉 조선족이란 호칭을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짙다.

 

대림동

가. 조선족호칭의 유래

이유는 조선족이란 호칭은 중국정부의 정치적인 용어이기에 싫다는 것이다. 또 ‘족(族)’이란 소외와 차별의 맥락에 의해 붙여진 것 아니냐, 다시 말하자면 조선족이란 소수자를 차별하는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싫다는 것이다. 조선족이란 호칭은 중국정부의 정치적인 용어가 아니라 법적 명칭이다. 즉 해외 720만 명의 재외동포 중에 유일하게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겨레만 거주국의 법적 명칭을 부여받았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겨레들이 모두 거주국의 법적 명칭이 없다. ‘족’은 중국이 56개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민족공동체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소외나 차별의 맥락에서 붙여진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기까지 수없이 제출하는 신청서, 이력서, 등록부 등 모든 서류에 반드시 민족을 밝히고 있으며 93%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도 반드시 법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러므로 소외나 차별의 맥락이 아니다. 그럼 조선족이 어떻게 중국에서 당당하게 법적 호칭을 얻게 되었는지, 그 역사과정을 살펴보자. 미국이나 일본에 이민 간 우리겨레들은 그 나라 이미 달리고 있는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이기 때문에 주인 의식이 희박하다. 이에 비해 만주에 이주 간 조선인(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 성립 전에는 조선인이라 불렀음)은 그 땅에서 삶의 터전을 직접 개척하였고 중국 사회변화와 발전에 직접 막대한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왔다. 조선인1세들이 만주에서 개간한 토지만도 무려 한반도 2배나 되는 40만 제곱킬로미터였다. 조선인은 절대다수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3성에서 조선인1세들이 알뜰살뜰 개울물을 막아 논을 개척하여 이밥(쌀밥)을 먹고 살아왔다. 이렇게 피땀을 흘려 개척한 토지에 의해 잘 먹고 잘 살만한 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악재가 닥쳤다. 당시 국민당정부는 조선인1세들이 개척한 토지가 전부 불법개간이니 정부가 소유권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농부는 토지가 생명줄이다. 토지를 박탈당하면 굶어죽는다. 바로 이때 야당인 중국공산당이 조선인을 찾아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내놓았다. “당신들이 우리 공산당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이고 우리 공산당 따라 항일에 적극 나서달라. 나중에 우리가 집권한다면 당신들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고 조선인을 중국공민(중국에서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공민이라 함)으로 호적에 등록해 줄 것이다.” ‘젖 주는 게 어미’라는 속담이 있다. 국민당은 젖을 몰수 하겠다 하고 공산당은 젖을 주겠다고 한다. 당연히 공산당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인은 공산당을 따라 항일전쟁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얼마나 나섰나? 연변에 가면 촌마다 마을마다 열사비가 있다. 항일전쟁에 목숨 잃은 조선인들의 열사비다. 중국공산당 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하였던 유명 시인이자 극작가인 하경지(賀敬之) 선생이 연변시찰하고 나서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열사비라(山山金達來, 村村熱士碑’라는 제사(題辭)를 남겼다. 1945년 일제가 투항하고 나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 주인자리를 다투는 전쟁에서 조선인은 공산당 따라 국민당과 적극 싸웠다.1949년 1월 1일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자 중국정부는 항일전쟁과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공산당 따라 적극 싸워온 조선인과의 약속(토지소유권부여, 중국공민권 부여)을 이행하였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는데 조선족 인구 미달로 1955년 자치구를 자치주로 행정급을 격하시키고 조선인이 법률상 조선족으로 인정되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인정된 것은 조선인들이 피땀 흘려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목숨 바쳐 싸워 대가를 치른 보상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족호칭은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지 절대 수치스럽고 못마땅한 호칭이 아니다. 한국인이 조선족의 이 유래를 알게 되면 절대 조선족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을 것으로 필자는 굳게 믿는다.

 

조선족11

나. 조선족은 56개 민족 중 가장 우수한 민족

1979년 개혁개방 전까지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 중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았다. 우수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문화제일, 위생제일, 체육제일 등 세 가지가 있다.

조선족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연변에 대학을 비롯해 소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급 학교를 세웠고 조선어출판사, 조선어신문사, 조선말 방송국을 세워 우리말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조선족은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힘입어 본래 ‘허리띠를 졸라 매고 자식을 공부시킨다.’ ‘집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전통을 발휘해 1960년대 들어 학교 다니지 못한 사람이 없을 만큼 문맹이 사라졌다. 문맹이 사라진 것은 중국 56개 민족 중에서 조선족이 유일했다. 조선족 대학진학율도 중국 56개 민족 중에서 가장 높았다. 조선족은 선조들의 피를 물려받아 문화와 예술에 능했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 덕분에 연변뿐만 아니라 기타 산재지역 조선족들도 조선족문화관을 세워 노래와 춤을 대중화 시켰다. 조선족의 춤과 노래는 중국 주체민족인 한족들도 알아줄 만큼 소문이 자자했다. 문화혁명 시기 김봉호 씨가 작사한 <붉은 태양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전 중국에 널리 퍼졌다. 2015년 시진핑 주석이 연변을 방문하였을 때 젊었을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또 조선족작가협회를 세워 문학보급이 잘 되어 민족의 소양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한류의 원조는 조선족의 가무문화였다. 조선족은 전통적으로 깨끗한 민족으로 소문났다. 중국 중앙정부 고위관리들이 연변을 시찰할 때면 연길에서 용정을 넘어가는 모아산 밑에 자리한 용산마을을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그들은 청결한 마을 위생환경에 탄복하고 집집마다 하얀 이불감, 베갯잇 등 하얀 빨래를 목격하고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난다.”고 토로하였다. 조선족 일색으로 꾸려진 길림성 축구팀은 1965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중국국가축구팀 선수 반 이상이 조선족이었다. 그때부터 조선족이 스포츠에 능하다는 소문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족은 손발이 영리해 축구뿐만 아니라 기타 스포츠항목에도 매우 능했다. 우수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렇게 세 가지였는데 필자는 한 가지 더 보태고 싶다. 즉 조선족은 보편적으로 사리가 밝고 시비에 밝은 민족이다. 그 이유는 단군의 홍익인간사상 전통이 작용한 결과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다. 조선족이 한국에 온 이유는 경제적 이득과 문화회귀 때문

현재 한국 거주 조선족이 국적취득자(13만 명)까지 합쳐 80만에 이른다. 이 많은 조선족이 왜 한국에 왔을까?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중국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 한국에 많이 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생각은 정말 잘못된 착각이다(한국학계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가 여러 분 있음). 조선족이 중국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 한국에 많이 왔다는 주장을 만약 중국정부가 알게 된다면 굉장히 서운해 할 것이다. 조선족이 능력만 있으면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고 조남기 선생은 중국 군비를 책임지는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군부 부장을 역임했고, 중국국방과학기술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다. 이 분이 개혁개방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서기에 임명되자 조선족은 쌀밥을 좋아하니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조치했다. 따라서 필자가 장춘에서 대학 다닌 1980년대 초중반 나라에서 학비와 기숙사비 및 교재비 전부를 부담할 시기에 조선족학생에게는 입쌀권 8근을 부여했는데 비해 한족학생들은 2근밖에 주지 않아 그들이 항상 조선족을 부러워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학생은 소수민족비로 달마다 4위안 씩 주었다. 당시 한 달 생활비 10위안이면 족했는데 4위안이면 큰 보탬이었다. 여러모로 살펴볼 때 조선족이 중국에서 차별 받고 소외되어 ‘한풀이’를 위해 한국에 많이 온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득과 문화회귀를 위해서이다. 조선족은 개혁개방 전까지 사회주의 집단생산시기에 보편적으로 한족마을보다 잘 살았다. 상부상조의 정신 덕분이었는지, 아무튼 상대적으로 한족보다 잘 살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개혁개방하자마자 조선족마을이 보편적으로 한족마을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반전이 생겼다. 그 이유는 조선족은 뭉치면 잘 살지만 개인적으로 흩어지면 못 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조선족은 개개인이 장사머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이 되자 시골 한족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에 사활을 걸고 겨울이면(동북지역 겨울은 5개월 정도) 싸리 광주리를 결어 도시에 팔고 빗자루 틀어 도시에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 이렇게 한족은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돈벌이에 집중하는데 비해 조선족은 농사는 대충 짓고 겨울 내내 할 일 없이 화투놀이나 하고 마작판에 붙어 세월을 보내면서 돈벌이 할 궁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해 지나니 누추하기 짝이 없던 한족마을들은 벽돌집이 척척 일떠서고 있는데 비해 조선족마을은 점점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을씨년스럽게 살고 있었다. 한족마을은 잘 사는데 조선족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족과 한족들의 부를 창조하는 길이 달랐다. 한족은 어떻게 하나 당지에 머물면서 부자가 되는 길을 택했던데 비해 조선족은 빈곤을 벗어나는 탈출구로서 1980년대는 러시아에 대거 진출했고 1990년대부터 한국에 집단적으로 대거 오게 되었던 것이다.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 조선족도 한국에 많이 왔다. 그 이유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은 해방 후 러시아와 가까운 덕분에 중공업기지였는데 개혁개방 이후 시대의 발전에 부응하지 못해 낙후되고 생산력이 떨어지자 도시 조선족 실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들도 빈곤탈출의 루트로서 한국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이 한국에 오는 숫자가 많아졌고 현재는 무려 80만에 이른 것이다. 하버드대학 헌팅턴 교수는 1993년 출간한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냉전시대의 인간은 이념에 따라 공동체집단에 귀속되었는데 냉전시대가 지나가고 동서이념대결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누구냐? 묻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래의 문화로 회귀할 것이다. 즉 민족은 전통 민족문화에로 회귀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유교문화에 회귀하였고 해외 화교, 화인들은 조국의 중화문화에로 회귀하였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조선족이 대거 한국에 오는 것도 민족문화의 회귀의 하나의 현상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조선족이 다른 나라에 가기보다 언어가 통하고 음식문화를 비롯해 통하는 문화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한국 삶이 편하다. 과거에는 돈을 벌면 고향 중국에 돌아가 산다고 했는데 지금은 돌아갈 움직임보다 한국에서 장기적으로 정착하려는 움직임이 더 크다.

한국정부는 조선족이 한국에 몰려 올 1990년대 초중반부터 그들을 문화회귀의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100% 외국인인력으로 취급하고 접근하여 모든 정책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숱한 폐단이 존재해 현재 내국인과 재한조선족사회는 물과 기름처럼 공존과 화합이 어려워졌다. 중국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신분증에 한글이름을 적어주는데 비해 한국법무부는 조선족에게 영어이름이 기재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례만 보아도 한국정부는 조선족을 동족으로 보지 않고 외국인으로 취급했다는 좋은 증거이리라.

 

라. 고향을 지키고 있는 조선족들

조선족이 미국, 일본을 비롯해 남미 및 남아공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에 안 간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지만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조선족이 꽤 된다. 정부 공무원, 의사, 교사, 기자 등 엘리트층에 속하는 조선족들이 소수민족정책을 받들면서 고향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조선족들, 대학졸업하고 재중한국기업에 근무하는 조선족도 많고 한국주재원들 집에서 가정부로 근무하는 조선족여성들도 꽤 많다.

그런데 민족문화는 본래 농촌공동에서 생겨나고 보급되는데 조선족전통농촌집거지가 사라지고 있어 민족문화도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다행히 중국 내 연해도시를 비롯해 대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들은 자신들의 단체와 동호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동시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한국인 주재원들과 문화교류를 통해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지키고 민족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조선말을 몰랐던 젊은 조선족들도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본래 민족조상(단군할아버지)도 모르던 데로부터 민족의 뿌리를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도 몰랐는데 한국에 와서 본관(本貫) 문화도 터득하여 배달민족으로 다시 거듭나고 있다. 이들이 고향에 있는 친구와 친인척들과 교류하면서 민족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역할을 하고 있어 조선족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조선족공동체해체론이 심각해진 현 상황에서 필자는 집거지는 해체되었으나 상기 여러 면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민족문화는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사회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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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김정룡

 

  • 프로필

김정룡 1961년 10월 29일 중국 용정 출생.

장춘대학 일본어학부 졸업

연변제일고등학교 일본어 교사

연길시 관광국 국장 역임

 

  • 현재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장

중국동포사회연구소 소장

중국동포민속문화협회 회장

서울시 관공서 대상 <중국동포문화이해교육> 강사

 

  • 출간저서

2011년 장편역사소설 <황제와 소녀> 한국서 출간.

2015년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천국의 그늘>,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멋 맛 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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