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탐구/신경호 고쿠시칸대 교수 … 검은 손들과 싸워 폐교직전의 학교와 수림문화재단 구한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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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7.02 15:32 Updated

■ 인물탐구/신경호 고쿠시칸대 교수  …  검은 손들과 싸워 폐교직전의 학교와  수림문화재단 구한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인물탐구/신경호 고쿠시칸대 교수

검은 손들과 싸워 폐교직전의 학교와

수림문화재단 구한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90년대 말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과 중앙대 법인처장, 신경호 고쿠시칸대(國士館大)교수 등 3명이 일본 동경 소재 학교법인 금정학원 산하 수림외어전문학교 처리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해야 한다”는 법인처장과 “폐교를 해도 돈이 든다며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는 신 교수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양측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 전 이사장은 “신 교수의 주장이 의미가 있어 보인다. 법인처장이 다시 한 번 검토를 해 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고 이날 회의를 마쳤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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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중앙대를 인수한 김희수 전 이사장은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평생을 고민해온 교육자였다. 만 13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마치고 갖은 일을 마다 않고 돈을 벌었다. 일본에서 덜 먹고 덜 자고 덜 쓰면서 기업을 일으켜 한때 자산 가치만도 수조원에 이르는 거상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기업경영보다 육영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으로 건너가 학교설립을 타진했으나 각종 인허가에 묶여 쉽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1984년 말 동경도 강동구 대도(오오지마) 땅을 샀다. 금정학원 산하 수림외어전문학교의 깃발은 이렇게 시작된다. 4년간 준비 끝에 1988년 1월 수림외어전문학교가 문을 열었다. 수림외어전문학교는 학교법인 금정학원의 2년제 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가르치는 4개 학과를 개설하고 첫 입학생을 뽑아 개교한 것이다. 수림외어전문학교 개교에 앞서 김 전 이사장은 1987년 부도직전의 중앙대를 전격 인수했다. 당시 겉으로 드러난 부채금액만도 700억원이 넘었다. 중앙대 인수에 따른 부채를 해결하고 10여년 간 수천억원을 투자했지만 김희수 전 이사장의 앞길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일본에서는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한국은 IMF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무리하게 중앙대에 투자를 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 됐다. 당시 부동산 가격은 한마디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폭락했다. 금융비용(이자)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일본 정부에서조차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본의 국부를 유출을 했다는 것.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IMF가 터지면서 수림외어전문학교도 300여명에 이르던 유학생들이 대거 보따리를 싸고 한국과 중국 등 본국으로 떠났다. 남은 유학생은 3-40여명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대와 수림외어전문학교의 경영진이 모여 학원정상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김 전 이사장과 당시 중앙대의 실세라고 불리던 박범훈 처장, 일본의 신경호 교수가 머리를 맞댔다. 이날 회의에서 박 처장은 일본에 있는 수림외어전문학교를 비롯해 모든 자산을 처분하고 김 전 이사장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수림학교 설립 당시 땅 매입대금과 임직원 퇴직금을 지급하려면 3억5천만엔이 필요하다. 그럴만한 돈이 있느냐”며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고 맞섰다. 특히 수림외어전문학교는 김 전 이사장의 정체성과 재일동포사회에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신 교수는 2+2 캠퍼스를 제안했다.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에는 일문학과가 있고, 안성캠퍼스에는 일본어학과가 있습니다. 이들의 학생들을 2년간은 중앙대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은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 간 위성캠퍼스를 열어 이에 따른 학비 일부를 일본으로 보내주면 수림외어전문학교는 다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일본의 대학들은 미국 등지에 캠퍼스를 열어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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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오리새끼를 백조로 만들다

신 교수의 파격적인 제안에 김 전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 처장은 “생각은 좋으나 인허가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검토는 해 보겠다”고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신 교수의 본의를 왜곡하고 비난과 질투의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신 교수는 박 처장에게 전화를 걸어 2+2캠퍼스를 물었다.

“신 선생! 왜 당신은 김 전 이사장을 꼬드겨 일을 만들게 하십니까. 침몰하는 학교를 살려보자고 하는 건데,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또한 교육부가 글로벌 캠퍼스를 허가 하겠습니까?”

신 교수는 더 이상 중앙대에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통역 1명만을 대동한 체 중국으로 넘어갔다. 흑룡강성과 요녕성 등 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해 중국의 오지까지 뒤졌다. 그리고 베트남의 호치민과 하노이까지 쫒아 다니면서 유학생들을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신 교수는 3번에 걸쳐 대상포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학교가 정상화 돼 가고 있었다. 3년이 지나자 조금씩 빚을 갚을 여유가 생겼다. 김 전 이사장에 용돈을 쥐어줄 수 있는 상황으로 역전됐다. 재기 불능의 식물학교는 신 교수의 땀과 눈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신 교수는 생각했다. 늘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어느 날 김 전 이사장을 찾아갔다.

“이사장님! 이제 학교도 정상화 됐으니 떠나겠습니다. 고쿠시칸대에서 1년을 못 버틸 수 도 있지만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한국에 가서 강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사장님께서 저를 크게 쓰시겠다고 하셨으니 보내 주십시오.”

김 전 이사장은 신 교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오히려 짐만 늘어났다. 이후 수림외어전문학교의 경영자이자 안방살림까지 책임져야 했다. 고쿠시칸대 시간강사라는 직책까지 수행해야 하는 상태에서 버겁지 않은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건 도박을 또 다시 일을 벌였다. 2001년 수림일본어학교까지 개교하고 최신 시설의 기숙사도 완비했다. 신 교수가 2005년 공식적으로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를 총괄하는 금정학원 이사장과 학교장으로 공식 등극한 배경이다.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모든 예산을 공개했다. 김 전 이사장이 “괜찮겠나”라고 물을 때 “이사장님! 겁나는 게 있습니까? 던져야 비로소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재일동포 사회에 투명경영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김 전 이사장은 “니 학교니까 니 알아서 해라”고 응답했다. 신 교수는 최근 동경 우에노역 근처에 제 3캠퍼스 설립을 위한 부지도 마련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기자는 동경의 금정학원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방학기간이어서 유학생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수림외어전문학교 이사장 방에는 30년 전 김희수 전 이사장이 사용하던 낡은 집기들을 지금껏 사용하고 있었다. 금정학원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백억원의 재산 친인척에게 모두 돌려줘

김 전 이사장은 살아생전 신 교수에게 선영의 관리를 부탁하고 2012년 영면에 들어갔다. 현재 수림문화재단은 전문 경영인이 이사장을 맡고 신 교수는 상임이사로만 참여하고 있다. 경영 전반은 철저하게 이사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김 전 이사장이 영면에 들어가자 신 교수는 가장 먼저 마산에 살고 있는 김 전 이사장의 친구인 향교장을 찾아갔다.

“향교장님! 살아생전 김 전 이사장이 저에게 당부하신 말씀과 약속이 있습니다. 이제는 김 전 이사장의 유가족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향교장은 노발대발했다. 그는 “김 전 이사장이 중앙대를 인수하고 잘 나갈 때는 수많은 친인척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정작 김 전 이사장이 힘들어할 때는 모두가 외면했다. 특히 김 전 이사장이 2년의 투병생활을 할 때 누가 병상을 지켰느냐”며 극구 말렸다. 신경호는 이렇게 향교장을 설득했다.

“향교장님! 저의 결정을 두고 하늘에서 이사장님께서 저에게 노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김 이사장님께서 후세들이나 친인척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일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저의 선택을 인정해주시고 도와주십시오.”

향교장은 신 교수의 설득에 “김희수가 사람 하나는 잘 봤구먼”하고 신 교수의 선택을 밀어줬다. 김 전 이사장의 재산은 경남 마산시 서원곡 땅 13만 8,000여평으로 현재 재산 가치로 따지면 수백억원은 족히 넘는다. 신 교수는 198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해 가을 김 전 이사장과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먼저 일본에 유학중이던 형과 그의 친구들이 신 교수에게 김 전 이사장을 소개했다. 신 교수가 일본으로 유학하기 전인 1982년 5월의 광주는 늘 폭풍전야를 방불케 하는 난세였다. 일본에서 유학중인 신 교수의 형은 1980년 5.18민주항쟁에 대한 후유증을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형은 광주에 있는 동생이 걱정됐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을 하는 등 현실정치에 매우 민감했던 동생에게 자칫 신변에 변고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형이 부친을 설득해 신 교수는 뜻하지 않게 유학길에 올랐다. 중고시절부터 폭넓은 활동을 하던 신 교수는 일본에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재일유학생들의 자치 활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면서 김 전 이사장과 인연을 만든 신 교수. 이후 신 교수는 28년간 김 전 이사장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왔다. 당시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자치활동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재일동포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면서 후원을 요청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화됐다.

“김 전 이사장은 다락방 수준의 작은 사무실로 찾아온 유학생들에게 늘 망국의 한(恨)을 극복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통 큰 후원을 해주셨어요. 특히 사람을 대하는 애정과 깊이가 남달랐습니다”

1984년 김 전 이사장이 수림외어전문학교 부지를 사고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할 때부터 신 교수는 김 전 이사장의 손과 발이 되고 각종 허드렛일까지 도맡았다. 이런 신 교수의 됨됨이를 눈 여겨 본 김 전 이사장은 급기야 2003년 신 교수를 한국사업의 후계자로 지목하기도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훗날 김 전 이사장은 신 교수에게 “내가 빨리 신 군(신경호 교수)을 중앙대로 내 보냈더라면 ..”하고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신 교수는 2010년부터 2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2년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김 전 이사장을 지켰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상일기를 쓰기까지 했다.

 

검은 손들의 공격에 자살 고민

신 교수는 1999년 고쿠시칸대 시간강사를 시작해 부교수에 오른데 이어 2005년 수림외어전문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 기간은 그의 일생에 가장 보람과 아픔이 교차한 시기이다. 그야말로 사투 끝에 수림외어전문학교를 정상화시켰다. 신 교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금정학원의 실질적인 경영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가정은 초라할 정도였다. 그의 아내가 파출부는 물론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소문이 김 전 이사장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신 교수의 자녀는 3명(현재는 4명).

“신군은 사나이 중에 사나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보상을 전제로 조건을 달았을 텐데…하지만 사람이 너무 울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나한테는 이야기 해다오”

김 전 이사장이 신 교수를 불러 “이 돈은 내가 알아서 주는 거다. 지출내역이 필요하니 영수증만 하나 써 다오. 이자도 없는 돈이다”며 3,000만엔(한화 3억원)을 건넸다. 이때가 2000년대 초반이다. “아이들이 많아 두 칸짜리 방이 부족할 테니 집을 넓히라”는 김 전 이사장의 배려였다. 이때가 유일하게 신 교수와 김 전 이사장간의 첫 거래이자 마지막 거래였다. 하지만 이게 또 다른 화근에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 전 이사장이 타계한 후 김 전 이사장의 직계후손이 유품을 정리하다 영수증을 발견하자 곧바로 신 교수를 고소했다. 결국 신 교수가 사는 아파트에 빨간딱지가 붙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신 교수는 연 14%의 이자에다 원금을 포함해 6억원이 넘는 돈을 갚았다. 마이너스 금리의 일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율의 이자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김 전 이사장이 투병생활에 들어가자 신 교수는 느닷없이 한국과 일본의 국세청으로부터 세무조사에 이어 배임과 횡령 혐의로 고발까지 당했다. 신 교수가 근무하는 고쿠시칸대에서는 “만약에 단 한건이라도 물의가 될 만한 사안이 나오면 각오하라”는 경고까지 떨어졌다. 중앙대를 두산그룹에 양도하면서 관여했던 사람들이 김 전 이사장의 자녀들을 앞세워 일본의 금정학원과 한국의 수림문화재단을 빼앗기 위한 집요한 공작을 벌였던 것이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전에서 신 교수는 무혐의 처리 됐다. 신 교수는 “소송이 진행되는 4년간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는 등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무혐의가 된 결정적인 배경이 바로 그의 일기장이다. 일본생활 34년간 단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다이어리에다 일기장, 미니 수첩 등 3중 일기를 써 왔다. 당시 신 교수의 이런 꼼꼼함이 재판관들로부터 인정된 것이다. 신 교수는 중앙대 양도 과정에 깊이 개입한 검은 손들과 신(新)․구(舊)재단의 근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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