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대/ 롯데그룹 … 유통거인 신격호 시대 저물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 재계 5위 달성한 불세출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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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7.01 16:37

■기상대/ 롯데그룹  …  유통거인 신격호 시대 저물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 재계 5위 달성한 불세출의 영웅

기상대/ 롯데그룹

유통거인 신격호 시대 저물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 재계 5위 달성한 불세출의 영웅

 

70년 유통거인 ‘신격호 시대’가 막을 내렸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지난 6월 24일 롯데그룹 지주회사격인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그룹경영에서 완전이 손을 떼게 됐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13개에 달하는 일본 롯데 계열사의 지주회사일 뿐 아니라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격인 호텔롯데의 지분 19%를 보유한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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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롯데홀딩스는 지난 6월 24일 오전 도쿄 신주쿠(新宿) 하쓰다이(初台)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공식적인 사유는 ‘고령’ 등이다. 다만 신 총괄회장의 명예회장 직함은 유지된다는 게 그룹 측의 설명이다. 신동빈 회장 등 기존 8명의 이사직은 그대로 유지됐다. 신 총괄회장은 지난해부터 일본 롯데와 한국 호텔롯데, 롯데쇼핑, 롯데제과 등 주요 계열사 이사직에서 차례로 물러난 바 있다. 마지막 남은 롯데알미늄 이사직도 오는 8월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여기서도 이사진에서 배제될 공산이 커졌다. 특히 이날 주총에서 관심을 끌었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신 회장의 친형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상정한 본인 등 4명의 이사 선임안과 신동빈 회장 등 현 경영진의 이사직 해임안은 부결됐다. 신 전 부회장이 롯데홀딩스 이사 선임을 통해 경영복귀를 시도했다가 좌절된 것은 2016년 3월과 6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2015년 8월에 신동빈 회장이 낸 안건에 대해 신동주 전 부회장 측에서 반대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주총 표 대결에서 신동빈 회장이 네번째 승리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무한주총’을 통한 경영권 탈환 의지를 표방한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날 ‘주총 4연패’에도 경영권 복귀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롯데가(家)의 골육상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롯데 관계자는 “이번 주총을 통해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지속적인 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며 “2015년부터 신동빈 회장이 한일 통합경영을 시작하면서 일본 롯데 실적이 개선되고 미래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주주들이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롯데까지 장악한 신동빈 회장은 한·일 롯데 공조를 통한 ‘동반 성장’과 일본 롯데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롯데는 50년 만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해 올해 약 320억엔 투자해 초콜릿 중간원료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초콜릿 시장 규모가 5년 전 대비 18% 증가하는 등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번 투자로 2년 후 일본 롯데는 초콜릿 매출이 기존보다 40% 증가한 1,100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 롯데아이스는 기존 우라와 공장에 추가로 70억엔을 투자해 생산라인 신설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할 계획이다. 지난해 일본 롯데는 과자, 아이스크림 매출 호조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6% 증가한 270억엔을 기록, 과거 최고치를 경신했다.

 

신격호, 한일 양국 불세출의 기업인 평가

신 총괄회장은 지난 70년간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이방인의 설움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롯데그룹을 일군 ‘불세출의 기업인’이라는 평가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껌 장사’로 일본에 롯데 왕국을 건설한 뒤 한국에 또 하나의 롯데 왕국을 세우며 양국에서 모두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22년 경남 울산 영산 신씨 집성촌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1944년에 졸업했다. 그 뒤 잠시 귀국했다가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도쿄에 다다미방을 얻고 우유배달은 물론 막노동과 사우나 등을 전전하며 돈이 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업에 눈을 뜨게 됐다. 1948년 신 총괄회장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겠다며 1948년 일본 도쿄에서 껌 제조사 ㈜롯데를 창업하면서 ‘롯데 신화’의 막을 올렸다. 껌 장사로 시작해 히트를 친 신 총괄회장의 롯데는 초콜릿(1963년)·캔디(1969년)·아이스크림(1972년)·비스킷(1976년)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일본 굴지의 종합 제과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껌 회사로 탄생한 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 1980년대 중반 이미 롯데는 일본에서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전자공업, 프로야구단 롯데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롯데리아 등을 거느린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신 총괄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1959년부터 한국에서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세워 껌· 캔디·비스킷·빵 등을 생산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인 1967년 4월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롯데제과는 당시 국내 처음으로 멕시코 천연 치클을 사용한 고품질 껌을 선보여 대히트를 쳤고, 이후 왔다껌,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후레쉬민트 등이 ‘대박’ 행진을 거듭했다.1972년 이후에는 빠다쿠키, 코코넛바, 하이호크랙커 등 다양한 비스킷 제품도 쏟아냈다. 한국에서의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신 총괄회장은 1974년과 1977년 칠성한미음료, 삼강산업을 각각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국내 최대 식품기업의 면모를 갖췄다. 1973년에는 지하 3층, 지상 38층, 1,000여 객실 규모의 소공동 롯데호텔을 선보이면서 관광업에 진출했고, 1979년에는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개장하면서 유통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비슷한 시기 신 총괄회장은 평화건업사 인수(1978년·현 롯데건설), 호남석유화학 인수(1979년·현 롯데케미칼) 등을 통해 건설과 석유화학 분야에도 발을 뻗었다. 식품-관광-유통-건설-화학 등에 걸쳐 진용을 갖춘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고, 잇단 인수·합병(M&A)을 통해 오늘날 국내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해탄 넘나드는 셔틀경영

신 총괄회장 역시 비운의 가족사와 함께 파란만장한 비운의 장면들도 적지 않다. 복잡했지만 조화를 이뤘던 가족사가 경영권 분쟁 등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의 말년을 더 초라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신 총괄회장은 故 노순화, 사게미쓰 하츠코, 서미경 씨 등 총 세 명의 부인을 뒀다. 1970년 사망한 노순화 여사 사이에는 장녀 신영자(73) 롯데복지장학재단 이사장이 있다. 둘째 부인 사게미쓰 하츠코와 사이에는 일본 롯데그룹을 담당하는 장남 신동주(61) 부회장과 한․일 롯데그룹 회장으로 등극한 차남 신동빈(60) 회장이 있다.

신 총괄회장의 셋째 부인 서미경(55)씨 슬하에는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32)이 있다. 서미경씨는 제1회 미스롯데 출신으로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깜짝 등장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 총괄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한 뒤 신동주․신동빈 형제를 낳았다. 신 총괄회장은 당시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 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의 사위가 된 것이다.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선 ‘롯데는 일본기업’이라는 인식을 심게 한 배경이 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은 스스로 일본이다”며 “뼛속까지 일본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귀뜸했다.

 

경영권 집착에 따른 골육상쟁 자초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신격호 시대’는 두 아들의 경영권 다툼으로 그의 초라한 말년의 결정적 단초가 됐다. 신 총괄회장이 과거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셔틀경영’으로 주목받은 반면 그의 두 아들은 한국과 일본 양쪽을 오가며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신 총괄회장은 2014년 12월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수억 엔의 손해를 회사에 끼쳤다는 이유로 그를 주요 임원직에서 모두 해임했다. 회삿돈으로 투자를 하면서 보고도 하지 않았고, 회사에 결국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에서였다. 2015년 7월에는 반대로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중국 사업 손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에게도 해임카드를 내밀었다. 이때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반격이 시작된 것.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돼 한·일 롯데를 총괄하는 ‘원톱’ 자리에 오르자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은 곧바로 부친을 앞세워 롯데홀딩스에서 신 회장을 해임하는 등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건 아니건, 쿠데타에 동참한 신 총괄회장은 결국 이 사건으로 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이어진 신동주·동빈 형제간 경영권 다툼에서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최근 대법원이 신 총괄회장에 대해 한정후견인을 지정하면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롯데홀딩스 정기주총에 앞서 열린 이사회에서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의 재선임안을 주총에 상정하지 않기로 한 것도 한국 대법원의 이런 결정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신 총괄회장이 회장으로 과욕을 부려 장기간 군림하며, 후계구도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고, 고령에도 경영에 미련을 못 버린 것이 2세간 다툼의 불씨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즉 신 총괄회장이 겪고 있는 말년의 고초는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 한·일 롯데의 총수 자리에 올라 경영권을 장악하려면 롯데홀딩스 주주 가운데 가족(광윤사), 종업원지주회, 임원지주회·관계사 등 3개 주요 주주 중 적어도 두 곳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상황을 두 아들에게 유산처럼 남겨 어느 한쪽이 포기할 수 없는 ‘무한 경쟁’을 야기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전후 70년대까지도 불모지였던 한국의 제과·관광·유통 부문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신 총괄회장의 업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면서도 “일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적절한 후계자 선정 시점을 놓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롯데 잠실시대 공식화

한편, 롯데는 롯데월드타워 완공에 따라 ‘잠실 시대’를 연다. 소공동에 있던 그룹의 ‘콘트롤타워’ 격인 경영혁신실은 이달 말부터 롯데월드타워로 이사한다. 6월 30일 경영혁신실 일부 팀이 먼저 입주하고, 다음 달 중순까지 경영혁신실 전체와 주요 비즈니스 유닛(BU), 컴플라이언스위원회, 사회공헌위원회 등이 이사를 마칠 예정이다. ‘롯데월드타워(123층·555m)와 롯데월드몰(제2롯데월드)’ 프로젝트는 무려 30년 전인 1987년 신격호 총괄회장이 “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대지를 매입하면서부터 시작된 롯데의 30년 ‘숙원사업’이었다. 지난 4월에 개장한 롯데월드타워에 신 총괄회장은 5월3일 직접 방문해 흡족해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공식 행보가 됐다. 롯데그룹 한 임원은 “신 총괄회장이 1987년부터 부지를 사고 초고층 빌딩 건설을 결심했을 때 주위의 반대가 심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초고층 사업은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들어가는 반면 단기간에 수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룹 내 누구도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이 있어야 외국 관광객들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다”는 신 총괄회장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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