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노벨평화상 수상자 故류사오보 … 인권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우리시대의 만델라 류사오보 영면에 들다 中,비인도적 비난 불구하고 화장으로 반체제 운동 차단 속내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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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8.01 12:08

■피플/노벨평화상 수상자 故류사오보  …  인권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우리시대의 만델라 류사오보 영면에 들다  中,비인도적 비난 불구하고 화장으로 반체제 운동 차단 속내 드러내

피플/노벨평화상 수상자 故류사오보

인권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우리시대의 만델라 류사오보 영면에 들다

中, 비인도적 비난 불구하고 화장으로 반체제 운동 차단 속내 드러내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 상태에서 투병 중이던 류샤오보(劉曉波·1955~2017)가 지난 7월 13일 끝내 숨을 거뒀다. 61세. 중국의 민주화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다섯 차례의 체포·투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아 ‘우리 시대의 만델라’로 불려 왔다. 그의 삶 후반부는 감옥에 갇혀 보낸 세월이 더 길었다.          김지원 기자

 

1955년 12월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베이징사범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중국 현대문학을 가르치며 평론을 발표하던 학자이자 작가였다. 하지만 격동의 중국은 그를 평범한 학자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당대의 저명한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를 비판한 ‘선택의 비판-리쩌허우와의 대화’로 이름을 떨쳤다. 컬럼비아대 방문 연구원이었던 1989년 봄, 그는 톈안먼(天安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다른 지식인 3명과 단식 투쟁을 벌여 ‘톈안먼의 4군자’라고 불렸다. 톈안먼 시위가 진압된 이후 소요를 선동한 혐의로 정치범 수용소인 친청 감옥에서 1년 7개월간 투옥됐다. 이어 1995년 톈안먼 사태에 대한 재평가와 정치 개혁을 요구하다가 다시 구금됐고, 1996년에는 대만과의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가 3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그는 수용소 구내식당에서 지금의 아내 류샤(劉霞·57)와 결혼식을 올렸다. 시인이자 화가였던 류샤는 이후 류샤오보의 유일한 면회자이자 대변인 역할을 했다.

류샤오보는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면서도 ‘심미와 인간의 자유’ ‘알몸으로 하느님에게’ 등 비판적 글을 쏟아냈다. 2003년 8월부터 국제펜클럽 중국 지회 회장을 맡으며 국제적 교분을 넓혔다. 2008년 공산당 일당 독재 개혁과 삼권 분립, 언론의 자유 보장 등의 내용에 공감하는 지식인 303명의 서명을 받아 2008년 12월에 발표한 ‘08헌장’을 주도하다가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1년형을 선고했다. 그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붓을 꺾고 입에 재갈을 물렸던 것. 하지만 그의 ‘부재(不在)’가 가장 울림이 큰 웅변이 되고 가장 날카로운 필봉이 될 줄은 중국 당국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2010년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의 주인공은 류샤오보가 아니라 ‘빈 의자’였다. 전 세계는 주인 없이 수상자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빈 의자를 통해 중국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시상식에 불참한 것은 1935년 아돌프 히틀러의 탄압으로 불참했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처음이자 유일하다. 당시 중국 당국은 류의 노벨상 선정 사실에 격분해 노르웨이와의 관계를 끊고 연어 수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사이 류샤오보의 육신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수감 기간 중 정기검진 등 적절한 건강관리를 했다고 강조했지만 항암치료마저 받을 수 없는 단계로 진행된 류샤오보의 병세 자체가 당국의 해명을 부정했다. 류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간암으로 인한 복막염과 신부전 등 복합 증세를 호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된 뒤에야 그를 외부 병원으로 내보냈다. 지난 6월 26일 AP통신 등 외신들은 26일(현지시간) 류샤오보의 변호사인 모샤오핑을 인용해 “류가 지난달 6월 23일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가석방돼 현재 중국 선양(瀋陽)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류샤오보가 특별한 계획은 없으며 그의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만 받고있다”고 덧붙였다. 류의 마지막 소망이던 해외 치료는 국제사회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 당국에 의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류는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순간까지도 중국의 인권 현실을 폭로하는 증인이자 증거물이 됐다. 중국은 다만 독일과 미국의료진의 진찰은 허용했다. 하지만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된 탓에 치료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류는 해외에서 온 의료진에게 “해외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을 밝혔다. 하지만 선양 병원 측은 “안전한 이송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미국과 독일 등 서방 국가들이 인도적 견지에서 출국을 허락하라고 외교적 압력을 가했으나 중국 당국은 “내정에 관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가 끝내 선양의 병원에서 사망함에 따라 그를 애도하는 국제사회의 추모 물결과 함께 중국 당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가오위(高瑜)는 류의 투병 소식에 “감옥에 가기 전만 해도 건강했는데 7년 후에 불치병과 싸우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충격을 드러냈다.

 

죽어서도 중국의 인권 현실과 맞싸우는 류샤오보

외신들은 류샤오보의 사망 소식을 긴급 타전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계 주요 국가 지도자들도 애도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BBC는 “중국의 가장 저명한 인권·민주주의 수호자가 숨졌다”고 했다. 일간 가디언은 “일당 독재에 항거해온 중국 민주화 운동가가 사망했다”며 “그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의혹에 대한 비난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류샤오보의 친구인 호주의 중국 학자 제레미 바르메를 인용해 “류샤오보의 말과 행동은 노벨평화상으로 인정받았지만, 중국 당국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그를 짓밟았다”고 전했다. 미국 공영방송 NPR도 “류샤오보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중국인”이라고 평가했다. 노벨 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류샤오보가 간암 말기에 이르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며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이른 죽음에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부인 류샤(劉霞)와 유족, 친구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했다”고 숀 스파이서 대변인이 밝혔다. 이와 별도로 백악관은 “시인이자 학자이며 용감한 운동가였던 류샤오보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데 삶을 바쳤다”는 추도 성명을 발표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시민의 권리와 사상·표현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투사 류샤오보를 추도한다”는 메시지를 정부 대변인을 통해 트위터에 올리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깊이 슬퍼하고 있다. 유족과 그의 친구들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위원장과 도날드 투스크 유럽의회 의장은 연명으로 성명을 내고 “최근 중국 정부에 류샤오보의 희망을 존중해 독일에서 치료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촉구했으나 (중국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며 강한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뒤이어 “유럽연합은 중국에 모든 양심수를 석방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벨상위원회는 류의 사망 직후 성명을 내고 “류샤오보의 이른 죽음에 중국 정부는 무거운 책임이 있다”며 중국을 비난했다. 중국은 류 사망 후에도 여전히 ‘내정문제’란 점을 들며 완고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겅솽(炅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7월 14일 오전 긴급 발표한 논평에서 “류샤오보는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이고 중국은 법치국가로 류사오보의 신병처리는 중국 내정이며 외국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라며 “관련 국가들에 중국의 사법주권을 존중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고 밝혔다. 중국은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한 보도와 인터넷 게시물을 통제했다. 관영 신화통신 영문판 등이 사망 사실을 간략히 보도한 것 외에 중국어 매체에서는 관련 기사를 찾기 어렵다.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인터넷 댓글도 즉시 삭제됐다. 중국 헌법은 집회·결사·언론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형식적이다. 특히 2012년 시진핑 체제 이후 인권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외교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은 지난달 연례 인신 매매 실태 보고서에서 중국을 북한, 콩고, 러시아, 시리아 등과 같은 최하위 3등급 국가로 지정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1월 표현·결사의 자유 측면에서 중국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중국 인권 활동가 네트워크가 중국의 인권 상황이 지난 20년 새 최악이라는 보고서를 낸바 있다.

 

바다에 뿌려진 류샤오보, 끝나지 않은 인권 투쟁

한편 중국 당국은 류샤오보(劉曉波)의 죽음과 관련,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고 류사오보 사망 이틀 뒤인 15일 “가족의 뜻과 현지 관례에 따라 류샤오보의 부인과 그의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장례식을 치렀다”고 밝혔다. 이날 류샤오보의 형 류샤오광은 기자회견에서 동생의 시신을 화장한 후 “몇 시간 뒤 유해를 바다에 뿌렸다”고 전했다. 류샤오보의 유족들은 시신을 보존하다 7일째 음식을 준비해 넋을 위로하는 민간 풍속을 따르길 원했지만 중국 당국의 요구로 서둘러 화장을 한 다음 유해를 바다에 뿌린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 류샤는 화장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날 당국의 화장 발표 기자회견에도 나오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류샤오보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한 것은 류샤오보 사망이 또 다른 반 체제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서둘러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관측이 나온다. 류샤오보의 시신을 보존하거나 유골을 매장할 경우 그의 묘가 중국 내 반 체제 세력 결집 장소가 될 수 있기에 서둘러 화장했다는 것이다. 류샤의 절친한 친구로서 반체제 활동을 함께 했던 인권운동가 후자(胡佳·43)는 “당국은 류샤오보를 기념할 공간마저 없애버렸다”면서 “하지만 그와 함께 활동해온 이들이 있으며 인권운동은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 15일 밤 홍콩 시민 수천 명은 도심상업지구부터 홍콩 중국연락사무소까지 고인을 추모하는 촛불행진 이어졌다. 중국연락사무소 앞에 설치된 임시 추모소에는 흰 국화를 든 시민들이 줄을 잇는 등 류샤오보에 대한 추모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돼 병원에서 치료 받을 때 아내 류샤가 류샤오보를 돌보는 모습. (AP 연합)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돼 병원에서 치료 받을 때 아내 류샤가 류샤오보를 돌보는 모습. (AP 연합)

옥중에서 굳건해진 사랑…

류샤오보 마지막 한마디는 “잘 사시오”

“수용소로 향하는 저 열차(駛向集中營的那列火車)

흐느끼며 내 몸 위로 구르네(嗚咽地輾過我的身體)

그래도 나는 여태 당신의 손을 잡지 못했네(我卻拉不住你的手)”

류사(劉霞·55)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면회를 가면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알리기 위해 남편을 면회하고 베이징에 돌아온 류샤는 이후 가택연금을 당했다. 2009년 남편이 투옥된 이후 당국의 부당한 탄압에 저항하는 뜻에서 8년간 머리를 삭발한 채 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당신을 위해 매일 싸울 수는 없겠지만, 당국이 허락하는 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면회를 가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켰다. 두 사람은 96년 옥중 결혼 직후 99년까지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300여통의 편지에 담아 전했지만 당국이 이들 집을 몇차례 가택 수색하는 사이 이들의 글과 편지는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류샤오보의 삶은 그의 아내 류샤를 떼놓고 말할 순 없다. 류샤는 남편을 20년간 옥바라지하면서 중국 당국의 핍박을 함께 견뎠을 뿐 아니라 남편을 대신해 중국의 반(反)인권 현실을 세계인에 폭로해왔다. 류샤오보가 마지막까지 해외에서 치료 받길 원했던 것도 아내 류샤의 장래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영국 BBC에 따르면 류샤오보는 류샤를 처음 만난 뒤 친구이자 출판사 편집자인 랴오톈치(廖天琪)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이 한 여인에게서 보았어.”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투옥됐다 풀려난 류샤오보는 교수직을 비롯해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다.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사이 첫 번째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때 류샤오보는 인생의 빛이 될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류샤는 은행 고위 관료의 딸로 유복하게 자랐다. 류샤의 부모는 의외로 두 사람의 관계를 허락해줬고 이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잠시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류샤오보는 항상 당국의 감시를 받는 상태였다.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랴오톈치(廖天琪)가 물었을 때 류샤오보는 계획이 없다면서 이렇게 답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지 애비가 경찰에 끌려가는 꼴을 보게 될 텐데 그게 싫어.”

류사오보는 2008년 ‘08헌장’을 주도한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류샤는 “당신과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는데…”라며 울었다. 랴오텐치는 “류샤는 남편을 떠나려거나 어떤 다른 불평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극한 상황을 거쳐야 했는지를 호소했을 뿐”이라고 전했다. 안타까운 마음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류샤오보는 “나는 유형의 감옥에서 형을 살지만, 당신은 가슴 속 무형의 감옥에 갇혀 있다”면서 “내 사랑은 다른 한편으로 자책과 후회로 가득차 있어 가끔 그 무게로 인해 비틀거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20년 부부 생활의 거의 전부를 떨어져 살았던 두 사람은 류샤오보가 간암 말기 상태에서 가석방되고 나서야 병원 중환자실에서 만났다. 류샤오보의 임종엔 아내 뿐 아니라 형 류샤오광(劉曉光), 동생 류샤오쉬안(劉曉喧) 등이 함께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남긴 말은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하오’였다. 류샤는 지난 8년 간 가택연금에 처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로 알려져 있다. 류샤오보의 타계 소식을 접한 세계는 이제 류샤의 연금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류샤오보가 평생 걸었던 ‘인권 투쟁’의 길 위에 이제 그의 아내 류샤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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