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투피플/노블레스오블리쥬 실천한 애국지사들 … 불꽃처럼 온몸을 태우고 스러진 잊혀진 영웅 6인은? 이상룡,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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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9.02 13:57

■피플투피플/노블레스오블리쥬 실천한 애국지사들  …  불꽃처럼 온몸을 태우고 스러진  잊혀진 영웅 6인은?   이상룡,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피플투피플/노블레스오블리쥬 실천한 애국지사들

불꽃처럼 온몸을 태우고 스러진

잊혀진 영웅 6인은?

이상룡,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문재인 대통령이 8월 15일 광복 72주년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을 언급하고 “임청각이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상징하는 공간이다“며 우리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쥬’정신을 간접적으로 역설했다.                <편집자 주>

 

문재인 대통령은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며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등 5명의 애국지사를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며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등 5명의 애국지사를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직업도, 성별도, 나이의 구분도 없었다”며 이태준, 장덕준, 남자현, 김용관, 나운규 등의 이름을 소개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며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한다”며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고,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다”며 “독립운동가의 3대까지 예우하고 자녀와 손자녀 전원의 생활안정을 지원해서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문 대통령에 의해 다시 돌아온 6명의 애국지사들을 정리한다.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

독립운동가 9명 길러낸 대표적인 명문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우리나라 대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한 명문가다. 석주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식솔들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기약 없는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쳤다. 국내에서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해봤지만, 그 방식으로는 도저히 일제를 이기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학식이 풍부하고 재산이 많은 석주 선생이었지만 부귀영화를 걷어차고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섰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물론이고 99칸짜리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일제는 독립운동 성지나 다름없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으려고 마당 한가운데로 중앙선 철길을 내고 행랑채와 부속건물 등 50여 칸을 뜯어내 오늘의 어색한 모습을 갖게 됐다. 선생이 서간도에서 독립단체 통합 노력에 주력하다가 1932년 유명을 달리하자 가문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석주 선생의 손부 허은(1907∼1997)여사 슬하 7남매 중 장남은 일본강점기 경찰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둘째, 셋째, 넷째는 실종되거나 사고로 숨지는 등 대를 잇는데도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허은 여사는 훗날 회고록에서 “(나라에)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선대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임청각을 방문, “안동이나 유교라고 하면 보수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안동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했다”면서 “(이들은)혁신 유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안동시 법흥동 법흥교 옆에 있는 임청각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 영산현감 이중공과 형조좌랑을 역임한 이중공의 셋째 아들 이명이 1519년 건축한 조선 중기 별당형 정자다. 영남산 기슭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고 99칸을 배치한 살림집으로 지었다. 대청에 걸려있는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로 알려졌다.

 

‣이태준(1883~1921) 선생

독립자금 지원 등 중국과 몽골 독립운동가 연락거점 제공

경남 함안 출신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대암 이태준은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그는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담하였다. 안창호는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직후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910년 2월 20일경에 석방된 후 세브란스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가 최남선에게 이태준을 추천하여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위기에 처하자 중국을 거쳐 몽골로 망명한 이태준은 당시 몽골에 비밀군관학교 설립계획을 하고 있던 김규식의 권유로 1914년경 몽골 울란바트로에 ‘동의보국’이라는 병원을 개원하고 몽골인들의 전염병을 치료하고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되어 몽골국가훈장을 받았다. 이태준은 이때 받은 치료비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몽골과 중국을 오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숙박지이자 연락거점을 제공했고 당시 의열단장인 김원봉에게 폭탄제조기술자를 소개해주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이때 몽골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쫒겨난 왕정파 군인들로 구성된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러시아 레닌정부가 독립운동 기금으로 상해임시정부에 건넨 200만 루블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를 보내왔다. 이때 4만 루블의 금괴를 상해임시정부에게 보내는 책임을 이태준이 맡고 있어 몽골의 정국이 혼란했지만 떠나지 못하다가 운게른 부대에게 38세의 나이에 학살됐다. 1921년 몽골의 이태준 묘를 찾아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며 이태준을 애도했다.

 

‣장덕준 (1892∼1920) 선생

간도참변에서 일본군의 만행 고발…한국 언론사상 첫 순직기자

추송 장덕준 선생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한 ‘기자’ 독립운동가였다. 장 선생은 동아일보가 정간 중이던 1920년 10월 ‘간도참변(경신참변·봉오동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를 파괴하면서 조선인 37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떠났다 일본군에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언론 사상 첫 순직 기자다. 당시 장 선생은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첫 소식을 보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됐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1921년 10월 28일자 기사에 따르면 장 선생은 한밤중에 일본군의 강요로 숙소를 나선 뒤 행방불명돼 일본군에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도 재령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장 선생은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육영회’(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 학생을 외국에 유학시키는 모임) 설립을 추진했고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장 선생은 1920년 4월 2∼13일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로 3·1운동을 왜곡하는 일본 여론을 비판했다. 장 선생의 동생인 설산 장덕수(1894∼1947)는 동아일보 초대 주간을 지냈다. 특히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통해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 여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또 1920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에 넘어가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다. 장 선생은 그러던 중 청산리 대첩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 작전으로 조선인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 간도 현장에 갔다가 실종됐다.

 

‣남자현(1873~1933) 선생

독립군의 어머니…혈서로 독립운동단체 통합 이끌어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윤옥’ 역할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는 남자현 선생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부친은 영남 지역 석학 중 한 사람이었던 남정한으로, 남자현 선생은 어린 나이에 소학과 대학을 통달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891년 18세에 김영주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선포(1895)이후 의병투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다.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던 남자현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아들을 데리고 남만주로 망명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 곳에서 임시정부 산하인 서로군정서에 입단해 활동하면서 부상병 간호 등을 맡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우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여자교육회를 10여개 곳에 만들어 여성들의 항일투쟁의식을 북돋으며 무장투쟁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잠입도 서슴치 않은 그는 당시 사분오열된 독립운동의 통합을 독려하기 위해 혈서를 쓰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산중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던 선생은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했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간부들은 누구나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한 피의 설유에 잘못을 회개하고 쌍방간 화합이 성립됐다”(‘독립운동의 홍일점-여걸 남자현’, <부흥> 1948년 12월호). 남 선생은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주살하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고 1931년 만주사변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연맹 리턴조사단에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서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고 혈서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33년 3월 만주국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제거하기 위해 거지로 변장해 작전에 나섰으나 조선인 밀정 이종현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속에서 17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순국했다.

 

‣김용관(1897∼1967) 선생

과학대중화를 통해 민족정기 세우려다 체포돼 옥고

김용관 선생은 과학자였다. 1897년 3월 21일 서울 창신동 출생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 요업과를 졸업한 요업전문가였다. 일본 유학중 일본의 근대화가 발명과학의 대중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 그는 1919년 귀국, 총독부 산하 중앙공업시험소 등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22년 조선공예학원을 설립,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다양한 신문과 잡지를 통해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연재하고 1933년 6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발명 전문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기도 했다. 또 1934년 2월 28일에는 김용관 선생의 주도로 31명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1809~1882)의 서거일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다. 과학대중화를 위해서는 과학데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한 것이다. 제1회 과학데이를 맞이해 김용관 선생은 라디오에 출연해 과학지식 보급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대중과학강연, 과학관, 영등포방직공장, 중앙시험소, 중앙전화국 등의 단체견학, 과학활동사진 상영 등의 행사도 진행했다. 이듬해 제2회 과학데이는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차와 군악대가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과학의 노래’를 연주하는 등 규모가 더욱 커져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 ‘다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분기하자!’는 그의 구호는 잠시나마 꽃을 피우는 듯 했으나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돼 과학행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1942년 가석방된 김 선생은 독립이 될 때까지 만주를 떠돌며 일본의 눈을 피해 살다가 독립이 되면서 한국에 들어와 서울공업고등학교 교사, 특허국 심사관, 발명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1건의 특허를 소유하고 있다. 과학으로 우리 민족을 굳건히 세우려 했던 그는 1967년 암으로 사망했다.

 

‣나운규(1902~1937)선생

<아리랑>으로 독립정신 고양…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 선생은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다. 1918년에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지방에서 약 1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했다. 1919년, 함북 회령에서 3·1운동의 중심이었던 명동중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연해주로 피신해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한 뒤 다시 북간도로 돌아왔다. 나 선생은 무장 독립운동단체 도판부에 가입했지만 학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더 크게 전개할 수 있다는 충고를 듣고 부대를 떠나 연희전문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도판부 활동을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21년부터 2년 동안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선생은 학업을 포기하고 예림회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 영화인의 길을 걷는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에서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심청전> <장한몽><농중조>등의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되었다. 나 선생은 1926년 10월 1일 <아리랑>을 선보였다. 6ㆍ10만세운동의 열기를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다. <아리랑>이후 제작한 <풍운아><금붕어> 등이 흥행하면서 그는 조선영화계의 스타가 됐다. 1930년부터 음성영화인 ‘토오키(talkie)’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35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토오키 영화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시녹음 실패와 재녹음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고, 폐병을 얻어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후 그는 원산만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1937년 토오키 영화 <오몽녀>를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했으나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활동한 결과 폐병이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3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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