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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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2.18 15:53 Updated

문화/영화 ‘동주’

문화/영화 동주

 

윤동주 송몽규 일대기 다룬 영화 ‘동주’개봉(소)

한 집에서 태어나 한 형무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스물여덟의 두 청년을 말한다

 

둘은 고종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했으며 자신을 사랑했다. 같은 해 한집에서 태어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문학청년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박정민)의 이야기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오는 18일 개봉된다. 소박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조용하지만 울림이 작지 않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1917년 간도성 연길현 용정 신촌 명동(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파평 윤씨 집안에 겹경사가 났다. 9월28일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이가 친정집에서 아들을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도 12월 30일 아들을 보았다.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 살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 소년이었다. 성격도 활달해 동료들로부터 리더십이 돋보였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었다. 반면 윤동주는 부끄럼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송몽규는 여덟 살 때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교장은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에 입학한 뒤,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한 후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다 1932년 4월에 은진 중학교에 입학한 뒤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부문에 ‘숟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당시의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문학의 재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송몽규는 이때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명희조 선생을 영향을 받게 된다. 1935년에 남경의 김구 산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적인 기질을 발휘해 「신민(新民)」발행에 관여한다. 한인반은 한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필요한 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는 학교다. 이후 송몽규는 제남(済南) 소재의 이웅일 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1936년 4월경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에 구류되어 취조를 받은 뒤, 같은 해 8월에 석방되지만 경찰로부터 ‘요시찰인’이란 낙인을 받고 일제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윤동주는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용정을 돌아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돼 친일계 학교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 수 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후 만주로 돌아온 송몽규는 다음해 4월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입학 후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였고, 1938년에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문과에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입학하자마자 송몽규는 그해 8월에 쓴 시 <밤>을 9월12일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등 당시의 어두웠던 제국주의 지배하의 조선 민족의 굴하지 않는 희망을 시사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연희전문대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1932년에 창간)를 이어받은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활동했는데, 시대의 압박으로 마지막 호가 발간되는 1941년 판「문우」에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를, 윤동주는「새로운 길」,「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일제의 잔혹한 생체실험 의혹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유학을 떠났다. 송몽규는 교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학 전공)에, 윤동주는 릿교대학에 들어간다. 그 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면서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그들은 일경의 감시속에서도 일제의 조선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는 등 그치지 않은 독립투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를 위해 송몽규는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데 이어 5일후인 14일에는 윤동주마저 체포된다. 송몽규는 1946년 4월12일까지, 윤동주는 1945년 11월30일까지 수형생활에 들어간다. 용정 윤동주 연구회 회장이자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김혁씨의 말이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도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했습니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7매 분량의 판결문에는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기존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이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방법론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형이 확정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됐다.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이들은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는 일제가 패망으로 줄달음치고 있을 당시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생체실험이었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최근 큐슈대학교 의대생들이 정부명령으로 당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와 이들 역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 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한국정부에서는 1995년 송몽규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바 있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용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용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용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 미터 가까이 손에 잡힐 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함께 한 벗이자 동반자였다.

송몽규 윤동주

사진/ 일본유학시절 친지들과 함께 한 송몽규(앞줄 가운데)와 윤동주 (뒤줄 오른쪽 첫번째)


 

윤동주 이상설 등 독립운동의 산실 용정 용정중학교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무대인 룽징(용정)에 있는 학교이다.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출신 학교로 많이 알려져 있다. 룽징 중학은 1946년 광명중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룽징(龍井(용정) 지역의 6개 학교가 통폐합하여 세워졌다. 옛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조선족 학교로, 윤동주가 다닐 때에는 ‘대성중학교’라는 이름이었으나, 현재는 ‘용정중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로서 윤동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학교 건물은 신관과 구관이 있는데, 구관 앞에는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건물 2층에 있는 사적전시관에는 윤동주의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하여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룽징과 주변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현재 매년 8만여명이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으며 주로 한국인이 대다수다. 이에 용정시 정부, 문화부, 교육국에서는 민족의 자긍심을 청소년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해 용정중학을 용정시 청소년 애국사상교양기지로 명명하고 용정의 전통과 한민족사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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