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이익을 남기는 회사 보다 사람을 남기는 회사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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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6.27 15:30 Updated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이익을 남기는 회사 보다 사람을 남기는 회사로 남고 싶다”

돈보다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회사로 남고 싶다

 

삼구아이앤씨는 국내 최대의 청소경비용역업체다. 15개 계열사에 종업원만도 23,000여명에 이른다. 지난해 6100억원의 매출을 올린데 이어 올해는 전년대비 20%가 성장한 750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예상한다. 매년 20%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고 있지만 영업이익은 초라함 그 자체다. 지난해 순이익은 고작 49억원. 영업이익률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회사는 아니다.

김성은 기자

 

삼구아이앤씨는 종업원의 90%인 2만1000여명이 정규직이다. 10%의 비정규직원 대다수는 여건상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한마디로 100%가 정규직인 회사다. 종업원 2만명이 넘는 국내 회사가운데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은 “업종상 많은 이익을 남기는 회사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을 남기는 회사로 만족한다”며 “일자리창출이 곧 기업의 사회적인책임(CSR)의 핵심이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비용을 감수하는 현실에서 ‘전 직원의 정규직화’는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한국 최고의 금메달감이 아닐까?

‘책임대표사원’, “공은 직원에게, 모든 책임은 대표가 진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나라 450만개가 넘는 사업체 대표 가운데 유일한 직책이 아닐까 싶다. ‘회장님이나 사장님’으로 호칭했다가는 민망할 정도로 혼을 내거나 시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거나 만날 약속을 할 때는 유독 신경을 써야한다. 기업의 현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그를 만나면 유독 절절함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스토리가 많다는 이야기다. 청소하는 아줌마를 여사님으로 깍듯이 예우하는 것에서부터 회사 창립 30주년 때 초청한 여사원들의 손을 맞잡았다가 거북이등처럼 딱딱해진 손마디를 확인하고 연단에서 큰 절을 올린 일, 시각장애인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눈물을 쏟아냈던 일 등 그와의 대화 속에는 늘 애틋함과 감동이 뒤따른다. 그래서 수많은 언론매체는 그를 만나기 위해 안달이다.

지난 8일 5년 만에 동작구 대방로에 있는 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5년 전에 보지 못했던 용인대경찰학과 동기생들의 사진과 전화번호, 그리고 현재 근무처가 적힌 명단이 탁자위에 놓여 있었다. 정부부처나 기자실에서 볼 수 있는 ‘출입기자명단’과 흡사했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용인대 경찰행정학과 동기생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가 사람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회사 주식의 47%를 직원들에게 나눠준 구 책임대표사원. 이 회사 직원들의 근속연수는 평균 약 10년에 달한다. 삼구아이앤씨의 가장 큰 경쟁력은 용역 직원들이다.

구 책임대표사원은 “업종의 특성상 직원들은 고객사에 파견돼 일을 하게 된다. 직원들이 청소를 하다가 빗자루를 부러뜨리거나 집기를 파손한 경우 본인이 배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불안해서 누가 제대로 일을 하겠느냐”며 “삼구아이앤씨에서는 모든 경우에 회사에서 이를 책임진다. 당연히 서비스 질도 좋아져 고객 만족도도 같이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굶주림

그가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밑바닥부터 처절하게 고난을 극복해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944년생인 그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낮에는 아이스케키통과 구두통, 메밀묵통을 들고 다녔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걸레와 빗자루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새벽부터 낮까지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늘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냄새 나는 공장과 시장바닥, 징글징글한 가난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배고픔의 굶주림은 한 끼의 굶주림이지만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굶주림이다.”며 공부에 매달렸다. 학교를 마친 후 동대문에서 미아리 집까지 걸어다니며 모은 한 달 버스비로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는데 그 때 읽은 책이 단테의『신곡新曲』, 괴테의 『파우스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같은 고전이다. 3년 동안 매일 새벽 한 시에 집에 돌아와서 밥 먹고 토끼잠 자고 세 시간 반 뒤 출근하며 1963년 구자관은 생애 첫 졸업장을 받았다.

군대를 전역한 뒤 아내와 함께 건물 청소를 다니며 모은 돈으로 아주머니 2명을 채용해 1968년 삼구아이앤씨의 전신인 ‘극동’이라는 청소업체를 설립했다. 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청소용 왁스를 불법 수입했다는 혐의로 관세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뒤 왁스를 직접 만들기 위해 솔벤트를 희석하는 와중에 불이나 온몸의 절반 이상이 3도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치료비 빚을 갚기 위해 시장 한켠에 좌판을 열었다. 좌절한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차를 몰아 잠수교로 뛰어 들었지만 천운으로 죽지 않았다. ‘죽음마저 뜻대로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한 구 창업자는 다시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1980년대 초 새로 권력을 잡은 정권은 초대형 행사를 많이 벌였는데 그 중 KBS가 주관한 우주과학 전람회가 열렸다. 알루미늄 캔을 모아주면 한 개당 10원씩 쳐주겠다고 했다. 청소는 적자였지만 깡통 팔아 번 돈은 몇 십 배였다. 그리고 1981년 열린 문화축제인 ‘국풍81’ 청소 입찰을 따냈다. 주관사였던 KBS 실무자가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사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KBS에서 주관한 행사의 청소를 전부 맡겼다. 입소문을 타며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로부터 일감을 얻었다. 덕분에 모든 빚을 갚고 재기에 성공했다. 직접 키울 형편이 못 되어 친척 집을 전전했던 아이들은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옷가지 행상을 하던 아내는 사모님이 되었다. 오십 넘어 스키도 배웠다. 젊은이들처럼 가죽점퍼에 쇠사슬 감고 오토바이도 몰아봤다. 2004년 용인대 경찰행정학과 04학번으로 입학해 학점 3.56으로 졸업했다. 그의 나이 예순 넷이었다. 2011년에는 현대사회의 노인문제를 연구하고자 서강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학위를 땄다. 예순일곱이었다. 기업경영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원칙대로 모든 수업과 시험, 논문을 스스로 해내며 따낸 값진 학위였다.

“삶의 고통과 질곡의 터널이 길었다.”는 구 책임대표사원은 이를 버틸 수 있었던 비결로 ‘열정’을 꼽았다. “열정은 멋진 꿈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고, 열정은 확신을 낳고 평범한 사람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열정만 있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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