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리포트/간호사 파독 50년

president
By president 2016.04.05 20:18

한민족리포트/간호사 파독 50년

한민족리포트/간호사 파독 50년

 

간호사파독 50주년,

그들을 향한 왜곡된 시선 바로잡아야 할 때

유럽 이주 1세대로서 진취적인 삶을 택한 파독간호사들

 

올해는 한국 간호여성 인력이 독일로 파견되어 일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 여성 10,032명이 독일의 병원에 ‘간호사’로 파견되었다. 우리에게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된 고마운 이들’이라는 이미지로 기억되는 파독 한인의 역사. 그간 매체에서 보여준 이들의 눈물겨운 고생 스토리는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주노동자로서의 서러웠던 삶’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1960~70년대에 파독간호사로 일했던 당사자들은 한국 사회에 비추어지는 자신들의 이미지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간호사파독 50주년을 맞아 그들의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조망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성은 기자

 

1974년~1977년까지 남부 독일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66세 윤명순(가명)씨는 남편, 아들과 함께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나오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파독 광부, 간호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아들이 보러 가자고 해 기대를 안고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섰던 그녀였다. 그녀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지냈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추억할 만큼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당시의 삶을 이야기해 왔지만 영화에서 그려진 파독 간호사들의 삶은 처참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시신을 닦고 갖은 구박을 받으며 설움을 당하는데다가 한국의 가족들에게 월급을 다 보내며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묘사된 그들은 가난에 희생된 안쓰러운 소녀가장의 모습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아들은 그간 들어온 어머니의 말과 영 딴판으로 그려진 그들의 삶을 보고는 “어머니도 저런 일을 하신 거였어요?”하고 물었다.

당시의 모든 파독간호사를 이러한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고 당사자들에 대한 큰 결례이다. 독일로 파견되었던 간호여성 인력에는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떠나는 자존감 강한 여성부터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 그리고 당시로서는 엘리트에 속하는 간호대학 출신, 간호보조원으로 속성교육을 받아 이주한 여성들까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가난했던 나라에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다양한 이유로 삶을 변화시키고자 기회를 찾아 떠난 것이다. 한국 여성으로 1960~70년대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충분히 진취적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한국에는 미국식 의료시스템이 도입되어 간호 분야의 교육수준이 요양 위주의 독일 간호사 교육보다 높았다. 그러나 한인 여성들이 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독일에서 큰 의미가 없었다. 간호사 파독 초창기에 그들은 단순히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였을 뿐이며 더구나 가난한 나라, 전쟁이 막 끝난 나라에서 온 여성들인 데다 모두 낮은 수준의 육체적 서비스업을 하러 온 가난한 여성들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당시 고용 계약, 조건, 노동 현장 등에서 통일된 규정들이 전혀 없었기에 떠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를 병원이나 근무처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운이 나쁘게 교외의 결핵병원이나 시골 숲속의 양로원, 정신병원에 배정받은 간호사들은 그곳에만 박혀 있다 몇 년 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 통곡을 하기도 했다. 운이 좋아 근대적인 시설에서 전문적인 일을 이어가며 일한 경우가 있긴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병원의 궂은일들을 한국 간호사들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인종차별을 겪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독일생활을 시작했고, 악착같이 이겨냈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천사’로 불릴 만큼 한국인 간호사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당시 독일 간호사들의 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나 그 이하였고, 전문지식이 없이도 취업이 가능한 직업이었으나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던 탓에, 독일의 여성들은 힘든 간호 일을 기피했다. 자국의 여성들도 기피하는 힘든 일을 성실하고 근성 있는 한국의 엘리트 여성들이 담당해주었으니 독일 사회야말로 큰 수혜자였다. 하지만 파독 간호사들은 갈수록 당당하게 독일정부와 병원에 권리를 요구했고 이들의 처우는 갈수록 개선되어 간호사 파독 후반기에는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 1977년 독일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을 때 한국 간호사들은 서명운동을 벌여 나가기도 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 가져왔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녀들의 호소는 독일 전역에 퍼졌다. 병원 환자들과 독일 시민 등 만 천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한국 간호사들의 체류연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해주었다. 다음 해, 독일정부는 특별법으로 한국의 간호사들에게만 무기한 노동권을 주었다.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상업차관을 받기 위해 팔려갔던 수출인력?

2008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인력이 한국에 기여한 부분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들의 조사에 동기를 제공했던 것은 실제 광부와 간호인력으로 독일로 갔던 한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조사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삶이 주변인들에게 떳떳하게 인식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의 이유를 설명했다.

가난한 집을 먹여 살리기 위해 떠났던 이들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상업차관을 받기 위해 팔려갔던 수출인력’이라는 해석이다.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독일의 차관 제공 과정과 간호인력 파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담론은 그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확산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도 이 루머가 사실과 다르다고 발표했으며 이후 몇몇 연구들이 그 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래서 사실상 폐기되어야 할 설이지만 이러한 설명은 광부나 간호 인력에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서술들에서 빠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1950년대 말과 1970년대 중순까지의 독일의 노동청과 관련된 기관들의 문서에는 이런 대규모 인구 이동과 관련된 체류허가나 고용허가 등에 관한 어떤 문건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차관 교섭과 두 나라의 경제협정이 이루어지던 시기 독일의 노동시장에는 이미 여러 경로로 한국인 간호노동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 병원이나 기관들에 충원될 노동력이 국가적인 사업을 위해 볼모로 잡혀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들 파독 간호여성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새삼 강조할 필요 없이 크다. 비슷한 시기에 파독되었던 광부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는 동안 사회 내에 외화벌이 효과를 주었다는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들에 대해 갖는 역사적 관심 또한 대개 이 부분에 모아져 있다. 보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이주노동을 감행했으며, 또 이주자로서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은 그저 그들의 삶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역사적인 사명감을 갖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내한 사람은 없었다.

 

파독간호사들이 남긴 말 말 말

“그렇게 어려웠는데도 그래도 뭐 우리는 밥 먹여주고 돈 주고 기숙사 주고 그렇게 해서 다 데려온 사람들이에요. 자기들이 필요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래도 뭐 누구는 타의 반 자의 반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웠어요. 국가가 그랬다고는 하지만 국가가 우리와는 상관없이 자유로웠지. 그래도 조건 좋고 대우받고 왔어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70년 정식 간호사로 독일에 간 간호여성)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들 중 일부는 퇴직 후 연금을 받으며 아직도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여성들도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독일에서는 간호사가 휴가를 가거나, 병가를 낸 경우 필요한 빈자리를 보충하는 인력으로 은퇴한 노인들에게도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나는 눈물 같은 거 안 흘렸어. 우리 올 땐 인력 수출 그런 말도 안 했다고. 오고 싶어서 왔고 한국에 돈도 안 보냈는데. 건물도 근대식에다가 간호사들은 간호사 일만 했어. 봉급도 좋고 휴가 가면 휴가비도 나와요. 우리 병원은 계약 끝나고 더 있고 싶으면 안 돌려보내. 난 어려운 거 몰랐어.”(독일의 한 병원에서 40년 동안 간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간호여성)

“나는 지금도 동네에 개나리가 피면 독일에서 일하던 병원 기숙사에서 병동으로 가던 길에 피어 있던 개나리가 떠올라 독일이 그리워져. 3월과 9월이면 3주씩 휴가를 쓰고 유럽 곳곳으로 기차 여행을 다니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립다니까. 우리 병원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인 우리에게도 차별 없이 휴가를 다 줬어. 그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 외화 낭비한다고 해외여행 꿈도 못 꿀 시절이니까 일이 고되긴 했어도 얼마나 좋았겠냐고. 가끔씩 그 때 다시 독일로 갔더라면 더 좋았을까? 상상해 볼 때도 있어. 지금 일하는 요양병원에서는 5일 휴가 내기도 힘들다니까.”(1974년~1977년 남부 독일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돌아와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간호 여성)

간호사파독 50주년. 그녀들의 행복한 추억을 기념해보는 것은 어떨까? 눈물겨운 고생스토리로 부각되어 의도치 않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된 그녀들을 자유롭게 하자.

_파독사진5

사진 5/ 2016년3월10일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은 간호사 파독 50주년을 상징하는 전통북 50개를 베를린간호요원회에 전달하는 행사를 갖고 기념촬영을 했다.

 

참고자료 : ‘독일로 간 한인 간호여성’ (나혜심 지음, 산과글)

‘유랑, 이후’ (최화성 지음, 실천문학사)


 

한상대회 운영위, 

4월27일부터 이틀간 제주도 롯데호텔서 개최

 

제15차 세계한상대회의 성공적인 준비를 위한 ‘세계한상대회 제28차 운영위원회’ 및 ‘제29차 리딩CEO포럼’이 제주 롯데호텔에서 4월27일부터 28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열린다.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첫날 오전에 열리는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해 제14차 세계한상대회 결과 보고 등에 이어 제15차 세계한상대회 운영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며 올해 대회장을 선출하게 된다. 또 내년도 개최지를 이번에 결정하는데, 차기 개최지 후보로는 경남·창원과 서울특별시 두 곳이 접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한상들은 글로벌 시대 차세대 리더 육성을 위한 ‘글로벌 한상 장학회’ 발대식도 열 예정이다. 글로벌 한상 장학회는 세계한상대회 운영위원, 리딩CEO 등 각국 한상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만든 조직으로, 이날 장학회 운영진도 뽑을 계획이다. 운영위원회에 이어 제주도 투자유치 설명회와 리딩CEO포럼이 진행되고, 다음날 28일 참석자들은 세계한상대회가 열릴 컨벤션센터를 둘러본다. 제15차 세계한상대회는 오는 9월27~29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제주ICC)에서 열린다.

president
By president 2016.04.05 20:18
댓글작성

댓글없음

댓글없음!

이 기사에 관하여 첫번째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댓글작성
댓글보기

댓글작성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표시는 필수입력입니다.*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