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하태환의 시사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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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5.06 20:15

논단/하태환의 시사토크

논단/하태환의 시사토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逢佛殺佛、逢祖殺祖、逢羅漢殺羅漢、逢父母殺父母、逢親眷殺親眷、始得解脫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그리하면 비로소 해탈을 얻을 것이다.

<임제록>

 

진정한 종교를 얻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하는데 그 말하는 바대로 행한다면 인륜과 도리를 넘어서서 지옥으로 곧장 직행하게 될 것이다. 그 옛날 당나라 시대의 임제 선사의 가르침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하니, 우리 인류는 세월이 갈 수록 더욱 더 아둔해져 가기만 하나 보다. 시간이란 것이 원처럼 돌고 돌아 윤회를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똑바로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버림으로 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해 아득한 추억과 향수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리고 현대인은 어떤 시간의 수레를 타고 있을까? 머리에 서리가 이고 나니 새삼 인생이 낯설어 보이고, 옛날부터 내려온 이런 화두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명상을 핑계 삼아 매달려보고자 한다.

불교는 특히 살생을 금하는데, 모든 존경과 권위, 인정의 대상을 죽이라 하는 이 가르침은 과장법과 반어법을 버무려 놓은 듯 한데, 그 간단한 문장이 자꾸 생각을 자극하고, 지금을 넘어서서 깊은 다른 것을 찾아 나서게 하는 마력이 있다. 고해 속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측은히 여기고 자비의 삶을 살라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알지만, 그렇게도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것이 실천이 안되는 이유는, 아마 그것들이 실제로는 앞의 말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비를 실천하고, 생명을 사랑하기 위해, 그 생명의 법인 부처를 죽여야 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서 평이한 구문의 이 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부처는 몇 천 년 전에 이미 귀천하였기에 다시 만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본래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분명 진정한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라면 이 역설을 진리로 여길 수 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로 바꾸면, 그것이 예수교의 본질적 원리를 담고 있어 보인다. 필경 참회하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이라면 예수를 만나거든 예수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참회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율법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그 본질에 대해 의심하고 숙고하면서 바른 길을 찾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참회자는 종교인의 반대 의미이다. 교조적 종교란,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맹목적 믿음과 공포 그리고 협박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단단하게 속박하는 제도적 총체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죽은 신이란 바로 이렇게 제도화된 신과 종교를 이를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비합리적 믿음의 정도이다. 따라서 교조, 권위, 속박을 부정하라는 이 말은 결국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고, 얼마나 맹목적인 믿음이 단단한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비합리적 믿음이 신도의 기준임을 인정하더라도 이 표현에서 아직 풀리지 않는 모순이 남는다. 불교인이 부처를 죽이고 예수교인이 예수를 죽이면 그 다음부터는 불교인과 예수교인이 아니게 된다. 불교인이 불교의 교리에 따라 불교인이 되지 말 것이며,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기독교인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되지 말아야 하고, 불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불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도 태생부터 예수를 부정하는 상징 행위를 시작한다. 예수의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 병정들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수색 체포하려고 할 때, 새벽이 오기 전에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하였다. 또 더 나아가서 또 다른 제자인 가롯 유다는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독교의 반석이 되고 전파자가 되었다. 예수의 제 1대 제자들이 최초로 예수를 만나 예수를 죽인 자들이라는 말이다. 로마서의 주인공인 로마도 예수교인들을 박해하며 체포하러 다녔던 인물로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선지자로 변신했다. 말하자면 예수를 만나 예수를 부정했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예수교인이 된다. 그렇게 보면 예수교의 본질은 언제나 예수를 만나 예수를 부정하는, 신뢰 부정과 양심의 가책, 죄의식, 그리고 그로부터 해방 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믿음과 부정, 믿음과 해방이라는 두 적대적 행동의 결합 속에 기독교는 힘의 근원을 둔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부정은 부처나 예수 본인들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에 깊은 회의를 하고 의구심을 가졌다는 사실 속에도 들어 있다.

그러면 이렇게 불교나 기독교처럼 인간 해방과 구원을 목표하는 종교들이 스스로를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러한 부정 자체가 종교의 본질이고, 해방과 구원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 속에 안주하고, 의심과 부정을 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꿈도 꿀 수 없다. 이어서 실천적 입장에서, 이러한 자기 부정에 이르는 극단적 자기 정화 처방은 무엇보다도 더 큰 긍정을 위한 부정이다. 즉 세속적 제도화와 고착화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타락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부처나 예수의 가르침이 세속적 종교로 변질되어 복잡한 규율, 제도, 권력으로 구체화되면, 급기야 해방이 아니라 그 해방을 내건 구속이 된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부정의 교리를 내걸었던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세속적 권력을 팽개치고 입산한 이유이고, 예수가 유대교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제자들이 자신을 부정할 것을 예언하며 그 길을 가도록 은근히 부추긴 까닭이다. 그렇게 하여 예수는 자기의 가르침이 몇몇 신비한 말과 주술, 제도들로 변질되어 성직자들을 위한 종단이 되는 것을 예방하였고, 특히 로마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세속적 권력이 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는 진정 양심적인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빤히 보고 있음에도 벌써 인간들이 자기를 신의 아들로 숭상하고 신격화하려는 순간에 깊은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예수교가 종교가 된 순간에 예수는 자폭이라는 강수를 둠으로써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제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였다. 거대한 성전 속에서 스스로 신이나 우상이 되어 버린 오늘의 성직자나 지도자들을 보건대 나는 얼마나 부처나 예수가 혜안이 있었나 감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종교 원조들이란 누구의 편이나 사적 소유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도 나에게 손가락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이 소외된 인간을 구원하기를 설파하였던 분들임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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