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라운드/가습기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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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5.24 21:46

CSR라운드/가습기 사태

CSR라운드/가습기 사태

 

가습기 살균제는 CSR외면한 국가적 재앙

기업․정부․학계․법률서비스기관 등 총체적 무책임이 빚어낸 ‘안방의 세월호’

 

사망자 293명 포함 피해자 1500여명. 이 가습기 살균제로 지난 5월 4일까지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신고된 피해자 규모다. 영유아나 아동, 임신부, 노인들이 폐손상증후군(기도 손상, 호흡 곤란ㆍ기침, 급속한 폐손상(섬유화) 등의 증상)을 일으켜 사망했다. 800만명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고 하니 피해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짐작할 수 없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종오 사무국장 argos68@naver.com

 

가습기 살균제가 첨가된 물을 방안에 뿜는다. 미세하게 쪼개진 물방울이 공기와 함께 사람의 폐 속에 침투한다. 이 물방울 속에는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 등 이름도 길고 생소한 살균성분이 폐 세포를 파괴한다. 가습기 살균제(PHMG)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선경인더스트리에 의해 1994년 처음 개발되었다. 당시는 카페트 첨가제 용도로 만들어 정부에 유해성 심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후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로 용도변경이 되어 공급되었다. 정부는 이 원료에 대한 유해성 심사를 하지 않았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르면 당시 PHMG는 ‘유독물’이 아닌 ‘물질’로 국립환경연구원에 등록됐다. 가습기 살균제품들이 1997년부터 속속 출시되어 매년 60만개 씩 팔려나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인 2002년. 옥시 제품을 사용한 유아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006년에는 소아 급성 간질성폐렴 사망자가 또 일어난다. 원인은 미상이었다. 2011년에는 임산부 4명이 폐질화으로 연이어 사망한다. 이 원인 또한 미상이었다. 정부 당국인 보건복지부는 그제서야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가습기 살균제가 폐손상 위험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5년의 세월의 흐른 2016년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지침인 ISO26000 표준에 소비자 대표로 참여한 서울연구원 문은숙 박사는 이 일련의 과정을 복기하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최초 사망 이후 9년이 지나서야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고, 14년이 지나서야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기업에게 법적 책임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 사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안방의 세월호’라고 불린다.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책임 주체들이 근본적인 책임을 망각하거나 그 위험성을 알고도 수수방관하거나 방치해 수많은 사망자를 포함해 수천명의 피해자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앞세운 기업과 연구기관과 변호기관 그리고 이를 오랜 세월 수수방관한 정부. 이 모든 기관들의 무책임이 만들어 낸 끔찍한 합작품이 바로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본질이며, 20년 만에 드러난 재앙의 실체였다. 그러나 이 재앙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2015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2%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해 잠재적 피해자가 더 늘어날 전망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무책임 – CSR의 이중기준 혹은 폐기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CSR)을 폐기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기업은 옥시를 비롯해 PB상품으로 판매한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과 살균제 원료를 만든 SK케미칼, 용마산업 등이다.

사실 유한회사 RB코리아(이하 옥시)의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는 다우존스지속가능지수(DJSI). FTSE4Good에 편입되고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 포럼)이 선정한 ‘지속가능경영 100대 기업’에도 오른 이른바 대표적인 사회책임경영 기업이다. 이 회사는 2001년 이후 ‘사용 제한물질 리스트’를 통해 소비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물질들을 자체 관리하고 있는 등 소비자 보호에 전력을 투구하는 회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은 영국 본사나 선진국에서만 적용되는 기준일 뿐 우리나라와 같은 개도국에서는 이러한 철저한 기준은 적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이중기준이다. 개별국가마다 화학물질 취급기준이 다른데, 다국적 기업들은 이럴 때 본사에서 적용하는 엄격한 기준보다는 자사에 유리한 방식의 기준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레킷벤키저는 영국 본사에서는 1998년 유럽연합이 제정한 ‘화학물질 관리제도(REACH)’를 준용하고 있다. 등록되지 않은 화학물질의 시장판매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정 전 국내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다. 때문에 제품의 유해성이 발견되더라도 책임소재를 가려내기 어렵다. 옥시는 2011년까지 11년간 450만 개나 되는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고, 이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 중 103명이 사망했다. 정부가 1, 2차 조사에서 밝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 146명 중 70%를 차지한다. 옥시는 처음에는 가습기 살균제와 사망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인하다가 검찰의 조사가 본격화되고, 유해성 보고서를 조작한 혐의가 있는 서울대 모 교수를 제포하자 그때서야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보상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PB상품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홈플러스와 롯데마트 등도 마찬가지다. 옥시를 비롯한 기업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면서도 고의로 이를 왜곡하고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옥시는 2011년 12월 주식회사 옥시 레킷벤키저를 해산하고 같은 날 유한회사 옥시 레킷벤키저를 설립했는데, 자사 제품으로 많은 소비자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도 ‘형사소송법 상 피고인격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으면 공소가 기각이 된다’는 점을 악용해 책임을 피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SK케미칼은 옥시 사태의 뒤에 숨어 있는 최대 기업 중 하나다. SK케미칼은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90%를 공급해왔고, 정부가 밝힌 피해자 중 90%가 SK케미칼 원료로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이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PHMG) 제조회사인 SK케미칼(당시 유공)은 1994년 “가습기의 물때를 제거하며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제품을 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2013년 심상정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SK케미칼은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흡입 독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SK케미칼이 2011년 가습기 살균제의 흡입을 권장하기 위해 피톤치드향과 라벤더향을 함유한 원액을 제조해 판매사인 애경산업에 공급한 사실도 드러났다. 애경이 판매한 ‘가습기메이트’는 유독성 물질로 인정된 CMIT/MIT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SK케미칼은 현재 검찰 조사에서 피의자 신분이 아닌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연구-법률서비스 기관의 무책임 – 조작과 은폐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적인 지침인 ISO 26000에 따르면 SSRO(서비스, 지원, 연구, 그밖의 조직)를 사회적 책임의 주체 중 하나로 언급한다. 대학의 연구기관과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도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옥시 사태를 계기로 대학과 기업 간에 이루어지는 불투명한 연구용역 관행과 대학의 연구윤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또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의 변호사 윤리와 사회적 책임의 수준도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검찰은 옥시가 서울대 등의 연구팀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해달라고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검은 돈을 주었으며, 연구팀은 실험결과를 조작•은폐했다는 혐의를 두고 있다. 구속된 서울대 조모 교수는 이를 부인하며 자신은 위험성을 경고했는데도 옥시와 김앤장이 서울대 연구팀 보고서를 발췌해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옥시와 김앤장은 이에 대해 연구에 관여한 적이 없으며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최대로펌인 김앤장의 사건수임이나 변론방식은 그동안 법조계에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아오고 있다. 또 사실 기업의 입맛에 맞는 학계와 연구기관의 보고서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갑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학생들의 취업이 걸려 있고, 연구과제의 수주액과 교수 평가 등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연구윤리는 팽개쳐 졌다. 제2, 제3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연구윤리 교육보단 연구내용 공개, 사후 징계·처벌 등 제도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실제 미국의 경우 연구결과 조작 등 비양심적 연구 행위에 연루되면 예외 없이 영구 퇴출시키고, 연구진실성국(ORI) 홈페이지에 신상을 모두 공개하는 등 매우 엄격하게 단죄하고 있다.

 

정부의 무책임 – 국민 생명 보호 의무 방기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이 ISO26000은 정부 또한 사회적 책임의 주체로 명시하고 그 역할을 기술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에 있으며, 정부는 실제 주체다. 그럼에도 이번 옥시 사태에서 우리나라 정부는 이러한 책무를 전혀 하지 않았고, 사회적 책임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경부와 보건복지부와 공정거래위원회 그리고 수사기관인 검찰까지 모두 옥시 사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ISO26000 제정 당시 우리나라의 소비자 대표로 참여한, 서울연구원 문은숙 박사는 “보건복지부는 가습기 살균제가 사망 원인이라는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고도 피해 문제는 제조사와 소송하라며 소비자를 외면했고,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환경보건법상의 환경성 질환으로 결정된 이후에도 피해신고조차 제대로 받으려 하지 않았다. 처벌과 퇴출이 필요한 곳은 보건복지부와 환경부다”고 일갈했다. 또 “공정거래위원회도 TV 등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가 안전하다고 허위광고한 옥시에 5000만원, 홈플러스와 버터플라이이팩트에 각각 100만원씩, 총 52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데 그쳤다. 롯데마트 등에는 경고조치만 내려졌다”며 “많은 소비자의 죽음을 부른 마케팅을 한 업체에 대한 처벌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보도에 따르면 정부(환경부)가 2009년 가습기 살균제 독성 성분을 어린이 환경유해인자로 선정하고도 이 물질이 시장에 유통되도록 방치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환경부가 실시한 연구용역 결과물인 ‘어린이용품 내 환경유해인자 종류 및 유해성목록작성’ 보고서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독성 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린(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린(MIT)을 ‘환경유해인자 목록(안)’에 포함시켰다. CMIT와 MIT 모두 면역독성과 피부·감각기관계 독성 및 알레르기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렇게 2009년 가습기 살균제 독성 성분을 어린이 환경유해인자로 선정하고도 화학물질 관리 실패로 인해 2009년부터 가습기 살균제 판매가 중지된 2011년 사이의 피해자 발생을 막을 수 있던 기회를 놓친 셈이다. 방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CMIT와 MIT는 가습기 살균제는 물론 물티슈나 방향제, 탈취제처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제품에도 다량 포함돼 있다. 이들 제품에 대한 안전표시기준은 지난해 9월에야 시행됐다.

공정위는 인체에 유해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면서 제품 용기에 안전하다고 허위 표시를 한 옥시 등에 2012년 7월 과징금 5200만원을 부과하고 검찰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나서다. 옥시는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압수수색에 대비해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1년치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통째로 폐기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옥시3법으로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재앙 방지

옥시 사태와 관련한 사회적 파장이 커짐에 따라 제2의 옥시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구체적으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그리고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고 이익을 챙긴 기업에 대해 실효성 있는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는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오래 전부터 제기해 왔고, 정치권에서는 이를 받아 관련 법률안도 발의했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의 거센 반발과 ‘손톱의 가시’라는 비유로 ‘기업 규제 철폐’로 기조를 바꾼 정부와 여당의 반대 혹은 의도적이라고 할 정도의 미온적 태도로 현재까지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옥시 사태의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아 제도 도입에 대한 정당성 높아지고 힘을 받아가는 모양새다. 먼저 징벌적 손해배상제(punitive damages)는 민사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악의를 가지고’ 또는 ‘무분별하게’ 재산 또는 신체상의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불법행위를 행한 경우에, 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시, 가해자에게 손해 원금과 이자만이 아니라 형벌적인 요소로서의 금액을 추가적으로 포함시켜서 배상받을 수 있게 한 제도이다. 즉 종래의 민사상 불법행위책임에 형벌로서의 벌금을 혼합한 제도이다(wikipedia). 피해에 상응하는 액수만 보상하는 전보적 손해배상제도(보상적 손해배상제도․compensatory damages)와는 달리 유사 행위의 재발방지에 초점을 두고 국가가 처벌의 성격을 띤 고액의 손해배상을 부과한다. 불법행위로 얻어지는 이익이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액을 초과한다는 계산 아래 징벌적 배상을 인정-불법행위자의 이득이 손해를 배상하고도 남는다면 안된다는 기본적 개념을 인정-한 최초의 사건인 1763년 영국의 ‘Huckle v. Money 사건’에서 처음 그 용어가 등장했는데,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주로 영미법계 국가에서 파급되어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2008년 2배수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했고, 중국은 2010년 무한책임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제품뿐 아니라 서비스나 용역 등도 모두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상이다. 셀럼, 캐멀, 윈스턴 등의 브랜드를 가진 미국 2위의 담배기업인 RJ레이놀즈토바코에 미국 법원은 폐암으로 사망한 장기흡연자의 미망인에게 역대 최대인 236억 달러(약 24조3000억원)를 지급하라는 징벌적 손해배상 평결을 내린 바도 있다. 레이롤즈가 자사 제품에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시장에 알리지 않았고, 유해물질을 포함한 담배가 안전하다고 허위사실을 말한 대가다. 올해 2월에는 미국의 미주리주 배심원단이 존슨앤존슨(J&J)의 파우더를 수십 년 동안 사용하다 난소암으로 숨진 사람의 유족에게 7200만 달러(약 840억원)를 배상하라고 징벌적 손해배상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주범인 옥시는 수백명의 피해자를 발생시켰지만, 손해배상금을 내도 회사에 큰 타격이 없다. 우리나라는 실제손해액에 위자료를 더하는 방식으로 손해배상금을 매기는데, 사망사건의 위자료도 통상 1억원을 초과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경부가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에 보낸 옥시 사태와 관련한 정부는 “우리나라는 유럽의 대륙법을 따르고 있다”며 미국 전통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우리와 맞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중 한 사람 또는 일부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다른 피해자들은 별도의 소송 없이도 그 판결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즉 판결의 효과를 소송당사자만이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 미치도록 하는데, 개별적 피해의 규모는 작지만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에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소송방식이다. 옥시나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처럼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을 경우 피해자 중 대표자만 소송을 하고 그 재판결과가 피해자 전부에게 적용할 수 있다. 이 집단소송을 실시할 때는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같이 청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영미법 체제를 가진 국가들에서 시행 중이다. 대륙법 체제를 가진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되, 소송주체를 법률이 정한 단체로 제한하고 공익성 소송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미국은 소비자 피해, 노동분쟁, 시장독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소액주주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증권 분야에 한해서만 집단소송제를 2002년 3월에 도입해 2005년 1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수집되지 않는다면 공룡 기업들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디스커버리(discovery : 증거개시절차)’ 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판이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 서로가 사건과 관련한 이메일이나 서류 등 증거가 되는 내부자료를 상호 열람하고 제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제도다. 합리적인 이유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류 제출 요청을 거부하거나 삭제했을 경우에는 판결에도 악영향을 준다. 옥시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한 이유는 ‘증거부족’ 때문이었는데, 우리나라는 민사소송은 요청하는 문서를 정확히 특정하지 않으면 안되며, 제출하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어 기업은 관련 자료 제공을 거의 하지 않는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이에 대한 대안이라는 말이다.

위의 세 가지 제도와 더불어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제도 중 하나는 ‘입증책임 완화’나 ‘입증주체의 전환’이다. 기업의 제조물로 인한 피해보상을 위한 제조물책임법(PL법)은 2000년에 제정되었지만 유명무실하다. 제조물에 대한 전문적 정보가 거의 없는 피해자가 제품 결함의 원인을 발견해 내고 이를 입증하는 책임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기업과 소비자는 심각한 정보비대칭 상태에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유명무실은 애초부터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래서 제품의 결함이나 피해와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책임을 가해자(기업)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면 그 ‘입증책임을 획기적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관련해서는 백재현 의원이 대표발의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과 서영교 의원이 대표발의한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안 등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제조물책임법안은 제조업자가 제조물의 결함을 알고도 필요한 조치 없이 상품을 공급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손해액의 12배까지 배상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소비자집단소송법안은 소비자가 기업의 불법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 일부의 소송 승소로 모든 관련 소비자가 손해배상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경제계는 위의 법과 제도 도입에 강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고의로 제기해 기업가치를 하락시킨 후 합병하는 등 악용하는 사례가 많고, 블랙컨슈머를 양산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정부와 여당도 이 논리에 동조해 왔다.

그러나 20대 국회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전망이다. 여소야대로 정치 지형이 바뀌었고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야 4당 모두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20대 국회의 핵심 해결과제로 꼽고 있다. 물론 여당이 새누리당은 가습기 살균 문제 해결에는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인 법안 처리는 정부의 조치 결과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징벌적손해배상제도와 소비자 집단소송제도 도입은 기업에게 막대한 부담을 줄 수 있어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옥시3법(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제조물책임법)에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타협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은 20대 국회에 더 강화될 걸로 보인다.

 

 

사진 /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발생케 한 옥시레킷벤키저가 5월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가운데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대표가 허리숙여 사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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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습기 살균제 사망 피해자 유족 김덕종(오른쪽에서 세 번째)씨가 영국 런던 옥시의 본사 연례 주주총회장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142명의 한국 아기와 임산부를 죽였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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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3월 9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본사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가습기살균제 원료공급사인 SK케미컬을 규탄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자의 92%가 SK케미칼의 원료로 만든 가습기 살균제 사용피해자”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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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이 3월 17일 오전 11시 서울중앙지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를 살인죄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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