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기 듀라코트회장, 아메리칸 드림은 땀 흘려 번 돈 남을 위해 쓸 때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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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6.07.04 17:50

홍명기 듀라코트회장, 아메리칸 드림은 땀 흘려 번 돈 남을 위해 쓸 때 완성

‘아메리칸 드림’. 미국에 이민을 가서 갖은 고생 끝에 막대한 돈을 번 거상(巨商)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공식은 아무래도 속물적이다.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은 땀 흘려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남을 위해 쓸 때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미주사회에서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박철의 기자 tie2409@naver.com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은 미국의 한인사회에서 롤모델로 평가된다. 여든을 넘긴 그이지만 미주 한인사회 및 그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 놓을 정도다.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로 부족할 것 없어 보이던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신발 끈을 고쳐 맨 이유가 뭘까. 1992년도에 터진 LA폭동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연은 이렇다. LA폭동은 흑인인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 도화선이었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의 언론은 1년 전에 터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미국 내 KABC방송은 한인들을 한․흑 갈등의 피해자가 아닌 원인제공자인 것처럼 보도했고, 이 밖의 여러 방송들도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즈가 두순자에게 총을 맞는 장면을 여러 차례 방영했다. 홍 회장은 이때 “한인사회에서 나만 살겠다고 몸부림쳐 왔던 지난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며 당시의 충격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부시대통령은 물론 연방정부 및 주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LA한인타운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LA폭동이 두순자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이너리티로서의 한인사회를 대변할 만한 대표가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 속이 상했고 충격이 컸습니다.”

2001년 홍 회장이 1000만 달러를 출연해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한 배경이다. 차세대 지도자 육성과 청년 기업가 지원, 각종 장학 및 사회복지 사업 등이 재단의 핵심 사업이다. 지난 15년간 재단을 통해 국내외 기부한 돈은 총 1200만 달러. 중소기업에게 결코 적지 않은 엄청난 금액이다. 그는 “백인들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는 미 정계에 차세대들을 진출시켜야 한국계 이민자들이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며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기부의 의미를 전했다. 이외에도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 미주 한인 이민100주년 기념사업, 대한인국민회관 복원,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기념사업, 밝은미래중앙문학상 등 한인사회 숙원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한인 사회 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앞장서 왔다. 지난달엔 한국 차세대 리더들 지원을 위해 제주도에서 출범식을 가진 ‘글로벌한상드림’ 이사장직을 맡는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간다.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에 있어 돈이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사람사이 관계더군요.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죠.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사회, 사랑이 넘쳐나는 커뮤니티를 만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함께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유학시절의 겪었던 아픔도 자선사업에 애착을 갖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다. 그는 UCLA마지막 학기에 학비를 내지 못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당시 백인 여교수는 이런 딱한 사정을 접하고 홍 회장의 손에 200달러를 쥐어줘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매출 25천만달러의 알짜 기업 듀라코트

홍 회장은 1954년 미국에 왔다. 서울대 낙방 후 미국행을 결심한 뒤 콜로라도 주립대 화학공학과에 입학 허가서를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는 언론과 영화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부친덕분에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유학생활 중 가세가 기울면서 목장에서 우유를 짜고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다 2년 뒤 LA에서 영화 사업을 시작한 부친을 돕고자 LA로 와 UCLA 화학과에 편입했다. 1959년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취직한 곳은 페인트 회사. 그 후 세 번의 이직 끝에 미국 굴지의 페인트 회사로 옮긴 그는 그곳에서 22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수석 연구원을 거쳐 연구소 소장까지 승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직장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인종차별로 인한 유리천장(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히트를 쳐도 승진에서 탈락했던 것. 1986년 자본금 2만 달러를 밑천으로 폰타나 소재 화학회사 컨테이너를 빌려 그렇게 1인 창업에 들어간 배경이다. 그의 나이 52세 때다. 창업 초반 사업은 가시밭길이었다. 그가 보유한 특수 페인트 관련 기술은 혁신적이었지만 혼자서 판로를 개척하는 것도, 제품을 만드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연구에 매진하랴 제품 생산하랴, 판로 개척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당시 페인트 원료는 늘 대기업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선점해 놓기 때문에 원료 구입자체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 아예 남들이 쓰지 않는 원료를 선택했죠. 물론 연구를 통해 품질은 월등히 더 좋게 만들었습니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은 그의 혁신적인 제품 개발은 적중했다. 얼마 후 듀라코트의 샘플에 만족한 한 기업이 그에게 선금을 주고 계약을 체결해 창업 6개월 만에 그는 15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후 사업은 승승장구, 건축용 철근 부식을 막는 ‘세레나멜’을 비롯해 다양한 특수 페인트 등이 대박 행진을 기록하며 창업 5년 만에 미국 내수시장을 석권하고 1996년부터는 한국을 비롯 네덜란드, 인도, 대만 멕시코, 중국, 캐나다 등에 수출 및 기술 제공을 통해 세계 특수 페인트 시장에서 탑5에 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현재 듀라코트는 리버사이드 및 앨라배마 주 2곳에 공장을 두고 연매출 3억 달러를 올리고 있다. 그는 성공 노하우에 대해 “나이 들었다고 실망하지 말고 끈기 있게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성공의 노하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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