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에도 죄가 있을 수 있다
최영남
종이에 손을 벤다는 말
듣기도 하고 직접 베어보기도 했는데
오늘도 또 책에 베었다
피가 빨갛게 맺히며
쓰리게 칼날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부드럽다는 게 방심하게 한 것인데
아니 방심도 없는 무심한 사이를
제 존재의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 원인은 내 탓이다
그래도 책 종이에 베었을 때는 약간의 서운함이 남는데
왜 아무런 적의도 없는 내 손가락을 공격하는가
오히려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 가까이했는데
오히려 존중하고 귀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런 미움도 없이 베인 상처
피가 엉겨붙기를 기다리며
알 수 없는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다만 부드러움에도 칼날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심에도 죄는 있을 수 있다
다만 나도 모르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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