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검은 거인’ 콜 전 독일 총리, 영면에 들어가다. 현대사 산증인, 통일 견인하고 유럽 통합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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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ent 2017.07.01 17:34 Updated

■역사인물/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검은 거인’ 콜 전 독일 총리, 영면에 들어가다.  현대사 산증인, 통일 견인하고 유럽 통합 이끌어

역사인물/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검은 거인’ 콜 전 독일 총리, 영면에 들어가다.

현대사 산증인, 통일 견인하고 유럽 통합 이끌어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지난달 16일 87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그는 통일독일을 상징하는 역사적 정치인이자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의 큰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독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우뚝하고도 뾰족하다.         <편집자 주>

콜

1990년 독일 통일은 같은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서방정책과 라이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에 비롯된 바 크지만, 콜의 본능적 통찰과 신속한 판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성취였다. 단연 그에게 ‘통일총리’라는 영예스런 별칭이 안겨진 이유다. 1982년 총리에 오를 때부터 행운은 따랐다. 총선 없이 사민당과 이별한 자유민주당에 손을 내밀어 잡고 독일 특유의 ‘건설적 불신임’ 제도의 첫 적용 케이스로 총리에 올랐다. 현직 총리를 교체하려면 후임 총리가 분데스탁(연방하원) 원내 투표로 뽑혀야 한다는 제도가 건설적 불신임인데, 바로 역대 첫 적용 성공 케이스로 그가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후임에 선출된 것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콜 총리 집권 초반의 장면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이들을 더불어 추념하며 독불(獨佛)의 화해열차를 초고속 레일 위에 올려놓은 ‘사건’이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 양국은 쌍두마차가 되어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등 유럽의 프로젝트를 이끌며 유럽연합(EU)의 질서를 주도했다. 편입학한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마치고 역사와 정치를 전공한 그는 갈수록 덩치가 산(山)만해졌지만, 정치적 기민함에서만큼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표현이 걸맞은 정치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세계사의 기적으로도 평가되는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닥친 소위 통일 정국에서 그의 정치적 감각은 빛을 발했다. 라이벌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점진통일론을 만지작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조기통일론의 논리를 세운 뒤 처음엔 마음속에 두었다가 이후 밖으로 꺼내어 전광석화처럼 밀어 붙었다.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발표, 동·서독 통합을 위한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 동·서독과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전승 4국 간 2+4 주변국 설득 통일외교, 1대 1 화폐 통합 등은 이후 여러 논란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콜의 정치력과 자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작년 별세) 당시 외교장관의 노련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나, 1990년 3월 동독에서 처음 치러진 자유선거는 그에게 결과적으로 통일총리의 타이틀을 안기게 되는 결정타였다. 평화공존과 점진통일을 내세운 사민당보다 조기통일과 화폐통합같은 급격한 노선을 내세운 기민당 주도의 ‘독일을 위한 동맹’ 정파가 압승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 동방정책 ‘병풍’을 배경으로 깐 구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정책이 소련 그 자체와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대변화를 일으키는 동안 있었던 1987년 서독에서의 구동독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과의 만남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슈피겔온라인은 이날 그런 콜의 작고를 전하는 기사에서 ‘검은 거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검은색은 기민당의 상징색이다. 그랬던 고인이지만, 정치적 후퇴 과정과 정계 은퇴 이후 말년 생활은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자신이 주도한 통일 이후 독일에 닥친 통일 부담과 경제 악화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1998년 정권을 내줘야 했다. 이후 기민당의 정치 비자금 추문에 휘말려 명예당수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떠난 뒤 건강 악화와 가족 불화설에 시달렸다.

 

‘통일 총리’ 콜이 메르켈에 남긴 유산

콜의 정치 역정을 현 독일, 유럽의 현실과 오버랩하여 회고할 때 앙겔라 메르켈에게 그가 남긴 유산을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평화와 번영을 그 존귀한 명분으로 앞세운 프로젝트인 현대 유럽 만들기는 애초 독일의 통일 추진 기획 속에서 탄력을 받았고, 통일독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통합유럽과 유로화의 동력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발전했다는 점에서다. 그 여정의 한복판에 1982∼1998년 총리로서 콜이 있었다면, 그가 발탁한 메르켈이 2005년부터 13년째 뒤를 잇고 있다. 구서독 함부르크 태생이지만, 동독에서 성장한 ‘물리학 박사’ 출신 풋내기 정치인 메르켈은 콜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을 상상하기 어렵다.

“콜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놨다”라고 한 메르켈의 콜 추모사는 콜이 1990년 통일을 이끌어 자신 같은 동독 출신의 숱한 인생이 전변했다는 것을 주로 염두에 둔 것이지만, 그 자신의 정치이력까지도 포괄했음 직한 언사가 아닐 수 없다. 관련 서적과 미디어들이 전하는 메르켈 연보를 보면, 메르켈은 1989년 11월 9일 친구들과 사우나를 하던 중 당일의 베를린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었고,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12월 동독 민주화 추구 정당인 ‘민주출발’에 들어가 대변인을 맡는다. 당세가 약한 민주출발은 이듬해인 1990년 3월 당시 동독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총선을 치를 때 기독민주당, 독일사회연합과 ‘독일을 위한 동맹’을 형성하여 라이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을 압도한다. 서독 기민당의 거두였던 콜은 그해, 공식 통일 선포기념일이 되는 10월 3일을 앞두고 1∼2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동, 서독 기민당 통합전당대회에서 드레스덴 출신 한 중개인을 통해 콜에게 소개됐다는 것이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슈테판 코르넬리우스 기자가 쓴 책 ‘앙겔라 메르켈, 연방총리와 그녀의 세계’의 기록이다. 두 사람은 다음 달인 11월 본에서 다시 만났고, 메르켈을 그렇게 눈여겨본 콜은 12월 통독 첫 총선에서 승리하고는 1991년 1월 통독 초대 연합정부 출범 때 정치초년병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장관으로 기용한다. 당시 세속의 눈으로 보면, 동독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메르켈은 비록 라이프치히대학(동독시절 카를마르크스대학) 물리학 박사 출신이기는 하지만 촌스러운 변방의 정치인에 지나지 않았다. 콜은 그런 그녀를 1994년 11월 이른바 콜 5기 내각 때 환경부 장관으로 다시 밀어 올린다. 메르켈은 콜의 후견 아래서 풍부한 연정 행정 경험을 쌓고는, 기민당이 야당이 된 1998년 이래 2005년 총리가 되기까지 사무총장, 당수, 원내대표를 차례로 지내면서 구서독 가톨릭 주류가 지배한 당의 권력중심을 파고든다. 메르켈은 특히, 2000년 4월 당시 콜의 황태자라고도 불린 볼프강 쇼이블레 당수가 당이 정치비자금 추문으로 위기에 몰려 콜과 함께 퇴장하자, 내처 당수에 오르고서는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메르켈이 그에 앞서 1999년 12월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기고문에서 ‘당은 콜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펼쳐 콜에게 결정타를 날렸고, 이후 콜이 명예당수직을 내놓고 정계은퇴까지 하게 된 일은 많이 알려진 사건이다.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콜의 부고 기사로 주요 면을 장식한 지난달 17∼18일 주말판에서 “소녀와 노인(또는 연장자) – 그렇다. 이건 하나의 소설을 위한 소재로 충분하다”라며 ‘콜의 소녀’라는 별명을 가졌던 메르켈과 그녀의 초고속 정치계 입문 및 성장을 도운 노쇠한 콜의 애증 섞인 관계를 빗댔다. 신문은 그러고는, 콜과 메르켈의 관계를 사제지간으로도 비유하며 “메르켈은 콜의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평했다. 적당한 때를 감지하고 극적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다수를 형성시키는 본능을 그녀만큼 누구도 키우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나아가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면서 관망하는 자세?’,  ‘침묵하기?’,  ‘시기가 무르익었다 싶었을 때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이라고 적고는 메르켈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이들 속성은 메르켈 정치의 특징으로 종종 거론되는 것들이다.

 

추미애 대표 조문

콜은 우리나라 정치인과의 인연도 몇몇 있다. 그 중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이 많이 알려진 편이다. YS가 야당 지도자였던 5공 말기 때 기민당 계열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이 서베를린 방문을 요청했다. 특히 YS가 당선되고 나서 1993년 3월 콜은 한국을 방문했고, 꼭 2년 뒤인 1995년 3월 YS가 독일을 찾았다. 둘은 10∼20대 등 젊은 시절부터 정당 가입 등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세련되고 치밀한 논리보다는 감각적 결단과 추진력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고, 나아가 시중 유머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에도 빼닮았다.

한편 정부는 헬무트 콜 전(前) 독일 총리 서거와 관련,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조문 사절로 파견한다고 29일 밝혔다. 추 대표는 내달 1일(현지시간) 유럽의회(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소재)에서 거행되는 유럽장에 참석한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유럽연합(EU)은 독일 통일과 유럽의 통합에 기여한 콜 전 총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사상 최초로 유럽장을 거행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등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조문 사절 파견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앞으로 조전을 발송, 콜 전 총리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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